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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서산 ‘명종대왕 태실’ 보물 반열 올랐다

국내 태실 문화재 중 첫 지정…도의 승격 신청 15개월 만에 결실

2018.04.20(금) 10:05:10 | 임정화 (이메일주소:dsfjkjfsjf@hanmail.net
               	dsfjkjfsjf@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충남 서산에 있는 ‘명종대왕 태실(胎室) 및 비’가 국내 태실 문화재 중 처음으로 보물 반열에 올랐다는 기쁜 소식을 충청남도민들과 함께 충남넷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불과 한달도 안된 3월26일자로 명종대왕 태실이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과, ‘보물 제1976호’로 지정됐다는 정부 고시가 나왔다.
이는 충남도와 서산시가 지난 2016년 12월 문화재청에 승격을 신청한 뒤 15개월 만에 거둔 결실이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도민리포터가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 6-2번지 꼭대기를 올라갔다 왔다.
지금부터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민족혼과 함께 살아 있는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원래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으로 만들어 둔 것을 뜻한다. 태실까지 만들어 태실을 봉안한 이유는 우리 선조들이 그만큼 예로부터 태아, 즉 출산과 인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원초인 태 자체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태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서산명종대왕태실보물반열올랐다 1


이번에 보물로 지정되기전까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돼있던 명종대왕 태실.
명종대왕 태실은 조선 13대 왕 명종이 태어난 1538년(중종 33년) 왕실의 의례에 따라 서산시 운산면에 건립됐다.
산에 오르기 전 초입에 이렇게 안내간판이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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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을 알현하기 위해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넓고 비옥한 서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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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저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태실을 만들어 태를 봉안했다니. 우리 조상님네들은 왜 이다지도 후손들을 힘들게 했을꺼나? ㅎㅎ...
오르막의 경사가 여간 험준한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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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태실이 있는 곳에까지 거의 다달아 보니 이렇게 태실을 지키는 석문(石文)과 안내간판이 서 있음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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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계단 바로 위,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니 저만치 위에 태실이 어렴풋이 고개를 내밀고 후손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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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게 바로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명종대왕 태실이다. 이 사진은 서산시가 정부에 보물지정을 요청하면서 함께 찍어 제출한 항공사진이다. 이 항공사진 한장 서산시에서 제공해준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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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대왕 태실은 받침돌 위에 태를 넣은 둥근 몸돌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바깥에는 팔각형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비는 태실과 함께 세운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 명종 즉위 이듬해인 1546년 세운 ‘주상전하태실비’, 1711년 추가로 세운 ‘주상전하태실비’ 등 서북쪽으로 세워져 모두 3기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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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태실의 핵심인 중앙부의 석종형(石鐘形)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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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풍화에 닳고 닳아 약간 흐려지기는 했지만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椿齡阿只氏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는 남쪽의 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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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실비는 명종이 태어난 4년 후인 1538년(중종 33)에 태실을 만들면서 세운 것인데 비석 앞면에는 ‘왕자전하태실(王子殿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인종(仁宗)의 승하로 중종(中宗)의 둘째 아들인 명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태실을 봉심해야 하기 때문에 1546년(명종 1)에 세운 것이다. 당시 본래의 귀롱대석 위에 비신과 이수를 새로 조각하여 건립하고 이전에 설치했던 비는 개수된 비의 오른쪽으로 옮겨서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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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이 비는 1711년(숙종 37)에 종전의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왕자전하태실비’를 개각하여 세운 것으로, 등이 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대좌 위에 용과 구름무늬로 새긴 이수를 가졌다. 비신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좌와 비신 이수를 갖추었는데, 비신이 대리석, 비좌는 귀롱대석(龜籠臺石, 거북과 용 모습의 돌)으로 만들어 위엄을 갖추었다.
 
조선시대 태실의 관리는 관할구역 관리의 업무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실을 고의로 훼손하거나 벌목 채석 개간 등을 하였을 때에는 국법에 의하여 엄벌하고 있었으므로, 명종 태실도 대체로 양호하게 관리되었다.
그러나 선조조에는 한때 태실난간 훼손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잠시 돌보지 않아 석조물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
태실에 봉안됐던 태항아리와 지석은 1928년경 일제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졌으며,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수습해 국립고궁박물관에 이전 보관 중이다.
 
조선왕조 태실은 본래 자리에서 옮겨졌거나, 일제에 의해 변형, 파손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명종대왕 태실은 그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고 태실과 가봉(加封)태실 변천 과정을 한눈에 살필 수 있어 조선 왕실의 안태(安胎)의례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등에 관련 기록이 상세히 전해지고 있고, 원래의 자리에 온전하게 남아 있으면서 주변 지형 등 환경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다.
그런 점이 작용해서 이번에 보물로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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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은 태아의 생명력이 ‘태’에서 나왔다고 보고, 출산 뒤에도 태를 소중히 보관했으며, 조선 왕실에서는 태를 봉안하는 절차와 의식을 규례화 해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태실문화로 발전시켰다.특히 명종대왕 태실은 국왕 태실 중 본래 위치에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역사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그리고 놀랍게도 현재 충남 도내 태실 문화재는 총 16기나 된다는 사실을 이번 취재과정에서 새롭게 알았다.
이 중 국왕의 태를 봉안한 가봉태실은 이번 서산의 명종대왕 태실과 금산 태조대왕(이성계) 태실, 부여 선조대왕 태실, 공주 숙종대왕 태실, 예산 헌종 태실, 현종 태실, 홍성 순종태실 등 7기로 경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역시 우리 충남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왕과 왕실 자손의 태를 보관할만큼 뛰어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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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태실이 있는 산에 올라 위대한 선조들의 혼과 얼을 알현하고 나니 기분도 좋고 행복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멀리 바라보니 더 넓고 큰 서산의 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 누워 백성들의 만복을 빌었을 대왕의 뜻을 다시 새겨보니 가슴 벅차다.
지금 모두 조금 어렵고 지치더라도 우리의 민족번영과 희망을 지켜주고 빌어주는 대왕의 뜻을 받아 다같이 힘내고 열심히 살자.
충청남도 파이팅!!
 
보물로 지정된 명종대왕 태실 보러가는주소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 6-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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