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25살에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윤봉길 의사

3.1절 앞두고 방문한 츙남 예산 충절의 혼이 담긴 충의사

2018.02.14(수) 13:27:27 | 도희 (이메일주소:ass1379@hanmail.net
               	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충의사는 일제강점기에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천장절 기념 및 상해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 의탄을 투척하신 윤봉길 의사의 위패를 봉헌하고 있다. 3.1일 절을 며칠 앞두고 추운 겨울에 방문한 이곳엔 바람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100년 전에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25살의 청년 윤봉길 의사께서 목숨을 바친 거사를 생각하니 나 또한 심장의 피가 끓어 오른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2

충의사 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생애와 대한민국 독립의 계기가 된 상해 홍구거사까지 자세한 기록물이 전시되고 있다. 윤봉길 의사는 16살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했고 18살에는 오수, 옥수, 임추 시집을 낸 여렬 시인이었다. 독서와 서경을 하여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3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3

효자백행지본야(孝者百行之本也)   효는 100가지 행동의 근본이요.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후양 때 주홍사가 지은 지본어 농이라는 말에서 비롯한 말이다. 농업은 천하의 대본이다. 효가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듯이 농업은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윤 의사님의 효와 농업에 대한 큰 뜻이 담긴 친필집자다. 

하늘과 땅은 몇 번이나 새로운 질서로 돌아올까. 선비와 대인은 언제나 맑은 기상을 갖고자 하느라.' 선비와 대인은 언제나 맑은 기상을 가지고 새롭게 돌아오는 계절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선비들이 새해를 맞이하여 가져야 할 덕목을 강조한 말이다. 이는 윤 의사의 기사년 일기의 서문과도 일맥상통한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4
윤봉길 의사가 19세에 1927년에 농민과 청소년을 계몽해 민족의식을 심어주려고 쓴 책이다. '농민독본'은 총 3권으로 보물 568-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 1권 한글 편은 84년만에 충의사에서 발굴하여 윤의사님이 한글을 중요시하여 일본어 대신 한글 교육으로 농민 청소년 문맹퇴치에 힘썼음을 알수가 있다. 이외에 예절과 격언, 인사 편을 가르치는 게몽편과 매헌의 사상과 사회의식을 담은 농민 편으로 구성된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5

1928년 2월 25일 부흥원을 설립 하고 상량식을 한다. 부흥원의 실천 목표는 증산운동 마을구매조합 만들기위해  일본물건배척, 증산운동, 토산품 애용이였다. 월진회기는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하얀 바탕에 초록색 3줄의 선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나타내고 무궁화 도안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번영하라 는 뜻이다. 그리고 윤 의사가 직접 지은 시량리가가 있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6

윤 의사는 1932년 4월 26일 거사 3일 전에 자필로 대한 애국단 선서문을 쓰고 가슴에 붙이고 왼손에는 폭탄 오른손에는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고 김구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남긴다. 상해 의거는 한 개인이 우발적으로 행한 행위가 아니라 '대한 애국단'의 이름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행한 거사임을 뜻한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7

선서문의 내용은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 애국단원의 일원이 되어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8

윤의사께서 거사 이틀전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남긴 유언 시다. 일본 가나자와에서 순국하실 때 십자가 형틀에 묶여 마지막으로 혼자 읊었던 시로 알려져 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 사를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자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윤봉길 의사께서 거사 하루 전에 홍커우 공원을 답사 하면서 잔디 위를 걸으면 쓴 마지막 시는  25세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가신 윤봉길 의사가 농촌부흥을 위해 바쳤던 열정이 민족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상하이 홍커우 거사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9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10
윤봉길 의사는 4월 29일 아침 김해산의 집에서 김구 선생님가 아침 식사를 하였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윤의사는 마치 농부가 아침밥을 먹고 논밭으로 일을 하러 가듯이 넉넉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윤 의사는 자기 시계를 김구 선생과 바꾸자고 한다.

" 선생님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게고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시계와 바꿉시다. 저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시계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님과 윤 의사님은 기념으로 시계를 서로 바꾸었다. 현재 충의사에는 김구 선생님의 낡은 시계가 윤 의사님의 유품으로 남아있다. 

25살에조국을위해목숨바친윤봉길의사 11

김구 선생님이 건내준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은 100년 전 의거 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해준다. 1930년 3월 6일에 고향을 떠난 윤 의사는 갖은 고생 끝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11시 50분에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승리 기념식장에 의탄을 투척하여 침략의 원흉인 일본 수뇌부들을 격살한다. 그리고 윤의사는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일제의 총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위대한 순국을 합니다.


 
 

 

도희님의 다른 기사 보기

[도희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