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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백성이 하늘” 외쳤던 123년전 공주 우금치의 오늘

동학농민전쟁 123주년에 다시 본 우금치와 영혼을 달래준 예술제

2017.11.20(월) 16:19:00 | 유병양 (이메일주소:dbquddid88@hanmail.net
               	dbquddid8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해마다 10월말에서 11월 이맘때 쯤 되면 뭉클하고 가슴 저미는 마음을 느낀다.
동학농민 봉기와 전쟁.
정확하게는 1894년 음력 10월23(양력 11월5일)부터 11월 15일까지 동학농민 전쟁의 분수령이자 최대 전투였던 공주 우금치(우금티라고도 부름) 전투가 벌어졌다.
우금치(牛禁峙).
이곳은 공주시 시내에 있는 주미산에 걸친 고개이다. 공주시에서는 우금티로 부르며, 아래쪽에는 국도 제40호선이 우금티 터널로 지나고 있다. 이전에는 공주 시내와 이인면을 연결하는 고개였으나, 우금치 남쪽의 이인면 일부가 공주 시내로 편입되어 공주 시내에 있는 고개가 되었다.
   

123년전 이맘때 동학농민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최대 격전이 공주 우금치. 지금은 외로이 혁명기념탑이 그들의 원혼을 달래며 우뚝 서있다.

▲ 123년전 이맘때 동학농민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최대 격전지 공주 우금치. 지금은 외로이 혁명기념탑이 그들의 원혼을 달래며 우뚝 서있다.


도민리포터가 취재를 하던 날, 전주에서 왔다는 천도교 관계자들과 젊은이들이 혁명군 위령탑을 참배하고 갔다.

▲ 도민리포터가 취재를 하던 날, 전주에서 왔다는 천도교 관계자들과 젊은이들이 혁명군 위령탑을 참배하고 갔다.


참배객들이 놓아둔 국화꽃

▲ 참배객들이 놓아둔 국화꽃


고부군수 조병갑의 전횡에 반발하면서 발생한 동학 농민 봉기는 전주 화약(和約)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일본의 국권 침탈이 심해지자 이에 분개한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서울을 점령하여 일본인을 몰아내겠다고 다시 봉기한다.
 
백성은 하늘이다
동학년 횃불 맨몸으로 일어 선
오늘도 백성은 하늘이다
짓밟힌 가슴
온갖 설움 받던 것들 함께 모여
타오르던 벌판
굴절된 역사의 어리석음으로
채 오르지 못하고 스러진
아 사무치는 우금치
산맥을 품고 달려 온 이들아
두 눈 크게 뜨고 보아라 여기
사람사는 세상으로 흐르는 강물
손길 발길 다지고 다져보는 흙담
알알이 쌓아 새긴 돌무지탑 염원으로
울려 퍼지는 자주 평등 대동 세상
어와 내 사랑 우금티에
백성은 하늘이다
동학년 봉화 고스란히 남은
끝끝내 백성은 하늘이다.

 
동학군을 위한 시. 가슴 한켠이 울컥해진다.
우금치는 충청감영을 목전에 두고, 고개도 넘어보지도 못한 채 무참하게 짓밟힌 동학농민군의 원혼이 소리 없는 통곡으로 절절히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날 쓰러져간 농민군의 소리 없는 통곡과 한이 서려 있는 고갯마루 북쪽, 공주가 바라보이는 그곳에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졌다.
 

혁명탑 좌우에는 이슬처럼 쓰러져간 농민군들을 위로하는 돌탑이 세워져 있다.

▲ 혁명탑 좌우에는 이슬처럼 쓰러져간 농민군들을 위로하는 돌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에 새겨진

▲ 기념탑에 새겨진 비문


그후 (사)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는 지난 10월28일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적지인 이곳 우금티 사적지에서 '2017 우금티예술제'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동학농민기념사업회와 김정섭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원장, 윤홍준 공주시의장, 충남지역 고등학생 등 500명이 참석했는데 당시 예술제 장면도 전한다.
 
조선 후기, 조정에는 부정부패가 판을 쳤다. 관직을 사고팔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더구나 조선의 밖에선 서양 세력이 조선을 위협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지치고 불안에 떨었다.
이때 새로운 세상을 외치며 등장한 종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동학이었다.
동학은 경주 출신의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했다.
민간 신앙에 유교, 불교, 도교를 합해 이상 세계를 제시했다.
조선을 침략한 서양 세력에게서 나라를 구하려는 반외세적인 성격도 갖고 있었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 즉 인내천을 내세웠다.
이들은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노비가 사라져야 한다고 외쳤다. 덧붙여 어린이와 여자를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동학은 어지러운 세상이 뒤집혀 백성들이 원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 믿었다.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시대를 벗어나 공정하고 평등한, 정의로운 낙원이 올 것이라는 믿음, 이를 후천개벽이라고 한다.
 
당시 살기 힘들었던 백성들에게 동학의 주장은 매력적이었다. 백성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동학에 열광했다. 그러나 이게 지배층들에게는 절대 마땅찮은 존재였다.
신분 계급이 엄격한 유교적 질서를 벗어나는 주장이었으니까.
결국 백성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동학을 금지하고 최제우를 잡아 처형했다.
하지만 최제우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동학을 믿었다. 이후 사회 모순에 맞서 싸운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공주 우금티에서 동학농민봉기 사상 최대의 전투가 벌어졌지만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과 관군의 무기앞에 학살 수준의 사장자를 내고 패퇴하며 혁명은 막을 내린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전쟁이라고도 부르는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으로,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 반봉건투쟁이었다.
또한 이른바 봉건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의 대결이었다.
탐관오리의 제거, 봉건적 제도의 폐단과 시정, 친일 외세 정권의 타도를 단계적으로 부르짖었으니 동학의 근본이념인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울림이 가슴 절절히 다가온다.
 
10월 28일 우금티에서 펼쳐진 예술제에서는 그때의 농민들의 함성이 울려 펴졌다. 123년 전 서울로 진격하지 못한 1만명의 동학 농민혁명군의 한 서린 울림이었다.

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군들의 원혼을 달래고자 펼친 예술제

▲ 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군들의 원혼을 달래고자 펼친 예술제


백성이하늘외쳤던123년전공주우금치의오늘 1


나가고 있다.

▲ 원혼을 달래는 행렬이 앞으로 나가고 있다.


농민군들의 원혼을 달래는 살풀이

▲ 농민군들의 원혼을 달래는 살풀이


제주를


하고있다.

▲ 원혼을 모신 신주에 다같이 절을 하고있다.


모습


공연은 동학의 정신을 노래하고 농민의 보물 씨앗단지와 솟대를 향한 평화의 춤을 추고 5인의 여인들이 펼치는 평화로운 종이 인형의 춤마당으로 문을 열었다. 갈등과 봉기, 찢기는 종이 인형과 동학의 죽음. 한줌 황토로 돌아가는 민중의 죽음 등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우금티 고개도 넘지 못하고 무참하게 짓밟힌 동학농민군의 넋을 위로한 살풀이 춤이었다.
 
우금티기념사업회는 1993년 창립 이래, 공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지역 주민들과 함께 노력해 왔다. 공주 우금티는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이 되는 해인 1994년에 국가사적지(제387호)로 지정될 수 있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를 고비로 농민 전쟁은 사실상 승패가 갈렸다. 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지고, 일본군과 관군은 무자비한 토벌 작전을 벌였다.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돼 그해 3월 말 다른 농민군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되는 비운을 맞는다.
 

에서 본 우금치 전경

▲ 위령탑 뒤편 왼쪽에서 공주방향 앞으로 본 우금치 전경. 저 산등성이 어디에선가 외세 배격과 민족자주를 외치던 농민군들의 함성, 절규가 들리는듯 하다.


에서

▲ 위령탑 서북쪽에서 이인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 이 고갯길을 넘어 공주로 진격, 천안을 거쳐 서울로 진격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이 지금도...


다시 보는 위령탑... 농민군들의 애국애족, 민족정신을 다시 새긴다.

▲ 다시 보는 위령탑... 농민군들의 애국애족, 민족정신을 다시 새긴다.


개항 이후 열강과의 불평등 무역 구조로 인한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고 지방 관리의 탐학과 조세 수탈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농민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지던 그 시절,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폭발했다가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는 반봉건, 반침략 투쟁으로 발전된 동학농민 봉기.
갑오년의 농민 전쟁으로도 불렸던 이 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19세기 말 농민 항쟁의 절정을 이룬 것으로, 이후 반일 의병 투쟁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민족대표 33인중 1명이었던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이 당시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서 북접의 총 지휘자로 활동했던 사실이 그를 증명한다.
123년전 오늘, 그때 그 자리에서 울려퍼졌던 “백성이 하늘이다”를 다시금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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