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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조선의 사대명필 자암김구선생의 흔적

2017.07.13(목) 16:51:03 | 게임이론 (이메일주소:gamethory7@gmail.com
               	gamethory7@gmail.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 예산 신암면사무소 근처에는 조선시대에 명필로 유명한 사람의 묘소가 남아 있습니다. 1519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지만 같은 해에  11월 남곤(南袞) 등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함께 투옥되어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남해로 옮겨졌습니다. 1533년 풀려나 고향인 예산에 돌아왔지만 이듬해 죽었다고 합니다. 

조선의사대명필자암김구선생의흔적 1

국도변에 있는 김구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가볍게 걸어보는 마음으로 묘소로 걸어 내려가 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유배를 간 김구선생은 남해의 노도라는 곳이었습니다. 노도라는 섬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배의 노를 많이 생산했다고 하여 노도(櫓島)라 불리게 된 곳입니다. 그 곳은 물고기가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청정해역으로 볼락, 농어, 감성돔이 잘 잡히는 섬이기도 하죠.
묘소는 이곳에 있지만 노도에는 유배문학테마파크가 조성되어 있는데요. 화전별곡을 쓴 자암 김구, 남해문견록의 저자 후송 유의양, 금산, 망운산 등을 한시로 노래한 남구만, 남천잡록을 쓴 김용 등의 유배문학가를 중심으로 하는 학습장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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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은 자학연구에 전념하여 학문이 조광조·김식과 견주었으며, 음률에도 뛰어나 악정에 임명된 적도 있습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양사언(楊士彦)·한호 등과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손꼽힐 만큼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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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수방(仁壽坊)에 살았다 하여 독특한 자암 김구선생의 서체를 인수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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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자암 김구선생의 책을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3년간 긴 적소생활을 화전 땅에서 보낸 문신 서예가 자암이 남긴 삶의 흔적을 ‘화전별곡’의 가락으로 엮어낸 책입니다. 화전별곡과 함께 조선 후기 사상의 흐름과 역사적 사건 등을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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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그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김구선생 작가는 고전의 올바른 문화사적(文化史的) 정립과 사적(史蹟) 선례에 표제(表題)하여 후대로 전해지는 시간적 공간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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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지나갔고 이제 묘소만이 그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통 유배라고 하면 안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김구선생은  토속적 남해유배지 역사문화 사적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해하고 그 시대적 사상과 이념의 가치관을 얼마나 수용 계승 발전하느냐 하는 것은 남해의 문화발전에 중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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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전에 공주에 있는 충남역사 박물관에 있는 자암 김구 벼루를 감상한 적이 있는데요.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한 일원연의 전형적 형식을 바탕으로 매화와 대나무, 두루미와 수달, 산수를 배경으로 낚시를 드리운 선인 등 조선 유학자들이 이상경으로 여겼던 도가적 자연소재를 벼루의 기능과 형태에 어울리게 배치하여 조형성 및 예술성이 높아 충청남도 유형문화 재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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