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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변란에도 고택이 파괴되지 않은 이유!

논산 명재 고택을 찾아서

2017.05.02(화) 07:01:21 | 원공 (이메일주소:manin@dreamwiz.com
               	manin@dreamwiz.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명재고택에 봄꽃이 활짝피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 명재고택에 봄꽃이 활짝피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사월의 연두 빛이 참 곱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연두색 일색이다. 어쩌면 저리 고울까?
아무리 오래 보아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저 고운 빛이 금세 사라질까 걱정이다.

“신록의 계절” 오월을 하루 앞두고 충남 논산 노성리의 있는 “명재고택(明齋古宅)”을 찾았다. 노성산 남쪽에 자리한 고택은 다른 양반가옥과 달랐다. 고택 뒤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을 뿐, 솟을 대문도 높은 담장도 보이지 않았다. 고택의 사랑채가 길가의 마당에 붙어 아무 경계 없이 맞아 준다.

마당에 잠시 서서 고택을 바라보았다. 사랑채는 기단(집터보다 한층 높게 쌓은 단)을 높이 쌓아 그 위에 올려 지었다. 기단 높이는 1m 정도 돼 보이는데, 사랑채를 마당에서 올려다보는 맛은 조금 부담스럽다.
이것으로 단지 경계를 삼은 것일까? 마루에 올라가 앉아 보았다. 마당에서 올려다 볼 때와 맛이 전혀 다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대접을 받는 느낌이다. 누구라도 마루에 올라앉으면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마당 풍경을 온전히 감상하며 담론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마당에서 바라본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
▲ 마당에서 바라본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 

이 고택은 명재선생의 말년(1709년)에 자손과 제자들이 뜻을 모아 지은 집으로 실제로 선생은 이곳에서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주변의 초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후손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으며 조상대대로의 비법으로 전해지는 전독간장이라는 장을 담아 장맛을 계승하고 있었다.

“전”은 예전의 것을 잇는다는 뜻이고 “독”은 항아리라는 뜻이다. 즉 조상으로부터 이어오는 장이라는 뜻이다. 한옥스테이가 가능하며 미리 예약을 하면 전독간장과 된장으로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명재고택 홈페이지에서 예약가능)
고택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사랑채 왼편에 있다. 사랑채를 내려와 열어 놓은 중문으로 안채를 들여다보았다. 안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중문 정면에 벽을 세워놓아 시야를 가려놓았기 때문이다.

중문으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들어가야만 안채를 온전히 볼 수 있다. 안채는 주로 여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밖에서 쉬 보이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한 것이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넓은 대청마루가 중앙에 있고, 양쪽으로 북쪽에는 방과 남쪽으로는 부엌이 배치 돼 있다. 사랑채가 남쪽으로 있으니 전체적으로는 ‘ㅁ’자 구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언뜻 보면 사방이 꽉 막혀 답답할 것 같지만 대청마루를 중앙에 넓게 만들어 놓아 아늑하면서 공간이 넓게 열려 있는 느낌이다. 채광과 통풍이 잘되도록 마루의 공간 배치가 잘 되어있다.  

대청마루가 있는 안채모습
▲ 시원하게 대청마루가 열려 있는 안채모습

수백개의 장독이 느티나무아래에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낸다
▲ 수백개의 장독이 느티나무아래에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낸다

안채를 나와 장독대로 향했다. 사랑채 옆 장독대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장독이 질서 있게 펼쳐져 있다. 옛날에 식솔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장독대는 노거수 느티나무와 함께 명재 고택의 찾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특히 느티나무 아래서 바라보는 봄의 고택 풍경은 압권이다. 기와집과 장독대가 궁합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장 익는 냄새도 좋다.
고택 뒤로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따라가 보았다. 붉은 빛을 두른 소나무가 피톤지드를 한껏 쏟아내며 반갑게 맞아준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기와지붕이 참 고풍스럽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가파르지도 않아 누구나 오르기에 불편함이 없다. 사색하기에도 딱 좋은 길이다. 사월의 산속은 활엽수들의 세상이다. 막 피워낸 연초록 나뭇잎이 어찌나 예쁜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영혼까지 맑아지는 느낌이다.

숲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참으로 많은 것 같다. 맑은 공기를 주는 것은 물론 그림 같은 산 빛으로 마음을 몽땅 빼앗아 무아지경에 이르게 해주니 말이다.

노성산 산길이 연두빛으로 가득차 있다
▲ 노성산 산길이 연두빛으로 가득차 있다
 
전망대에 올랐다. 교촌마을과 함께 넓은 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도 들도 제법 크다. 예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윤증(尹拯)선생은 소론의 영수로 호가 명재(明齋)이며 조선 숙종 때 사람이다. 왕이 우의정까지 벼슬을 여러 번 내렸으나 병자호란 때 순절한 어머니를 위해 모두 고사하고 초야에 묻혀 오로지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보통 양반집하면 높은 담장이 있어야 하지만 명재 고택은 담장도 대문도 없다. 그 이유는 뭘까? 명재선생은 죽기 전 자기 제사상 크기(가로 세로 90센티)까지 미리 정하여 놓고, 간소한 음식을 당부할 만큼 평소 생활이 검소하고 소박한 학자였다고 한다.

권문세가라고 하여 자기만 호위호식하려하지 않고, 평소 1식 3찬의 소박한 식사를 하며 주변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늘 배려하였기에 주변에 원한도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굳이 외부인을 경계하는 높은 담을 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배롱나무가 300년을 지켜온  장방형의 연못
▲ 배롱나무가 300년을 지켜온 장방형의 연못 

명재 선생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뽕나무를 심으면 윤씨 집안에서는 뽕나무를 심지 않도록 엄명을 내리기 까지 했다고 한다.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던 것이다. 각박하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신록이 푸르러가는 고운 봄날, 명재고택을 돌아보며 한옥에 고스란히 배여 있는 선조들의 생활의 지혜를 생각해 보니, 닫혔던 눈이 다시 열리며 고택의 아름다움에 푹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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