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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만추의 추사고택

2016.11.24(목) 11:26:15 | 도희 (이메일주소:ass1379@hanmail.net
               	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만추의추사고택 1 
가을 녘 들판을 가로질러 고즈넉한 마을이 자리 잡은 곳, 추사의 정신이 깃든 곳 추사 고택을 찾았습니다. 추사 고택의 솟을 대문을 지나면 사랑채 나무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에는 예서체로 쓴 추사의 글씨가 마치 추사 김정희 선생님을 뵈듯이 반깁니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조선 시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면서 하사받은 부지에 각 고을에서 한 칸씩 기부받아 53칸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만들어진 전형적인 중부지방 반가의 모습입니다. 사랑채 앞 추사 선생님께서 직접 만든 해시계는 돌기둥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했던 것으로 추사 선생님의 아들 상우가 추사체로 석년이라는 글씨를 써넣었습니다. 추사 고택에는 권위와 배려가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부분이 있으며 사랑채에 있는 섬돌이 원래는 한 개였습니다. 사랑채의 섬돌을 지나 주인에게 인사를 올린 후에 손님방으로 건너가고 나올 때도 주인이 머무는 섬돌로 돌아 나오며 인사를 해야 하는 가옥구조입니다.  

만추의추사고택 2

안채는 권위의 표현으로 3단 기단을 두어서 추사 영당을 돌아 안채의 뒤 뜰로 걸어 나오면 지세의 흐름에 따라 아름다운 한옥 지붕의 선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영조의 둘재 딸 화순 옹주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과 결혼하여 생활하였던 안채 3단 계단식 지붕 아래에는 6칸 대청마루가 있습니다. 안주인이 마루에 서면 마당에 선 사람과 갑과 을의 관계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수직 시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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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선생님의 영정을 모셔놓은 뜰에는 추사 선생님이 일생 동안 3번의 유배생활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셔서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하셨던 것처럼, 삶의 세파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추사의 기개가 오죽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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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영정을 모셔놓은 영실로 올라가는 뒷뜰의 키 큰 감나무는 잎을 모두 떨군채 빨간 감이 대롱대롱 달려 있습니다. 지붕보다 유난히 낮은 굴뚝이 눈에 들어 옵니다. 이곳의 굴뚝이 낮은 이유는 조선 시대에 가난한 백성이 양반가에서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염려를 배려해서 굴뚝을 낮게 새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낮은 굴뚝에서 새어나오는 연기가 살균 효과가 있어서 해충을 방지했습니다. 추사 고택을 눈여겨보면 우리 옛선조들의 권위와 배려가 있는 건축구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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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고택 정문 좌측에는 추사 선생님의 묘가 있고 우측에는 추사 선생님의 증조부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습니다. 김한신 묘 앞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께서 청나라에서 가져다 심은 보물 106호인 백송 나무가 있습니다. 김한신 묘 우측에는 화순옹주의 열녀문인 홍문이 있습니다. 이 홍문은 추사 선생님의 증조부 김한신께서 38살에 돌아가시자 영조 임금님의 둘째 딸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고 부군을 따랐습니다.

영조 왕이 직접 미음을 만들어서 딸에게 찾아가서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일어나라고 간곡히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순옹주는 입에 고이는 침을 뱉뱉가며 결국 그의 남편을 따라갔습니다. 영조는 아버지의 간곡한 청원을 거절한 딸이 야속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으셨고 후에 정조 왕께서 홍문을 지어 열녀문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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