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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백제 미스터리의 주인공 무령 기획 전시

2016.09.09(금) 09:10:59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백제시대에 왕의 치세보다 무덤으로 더 알려진 왕이 있다. 고구려에 밀려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의 기운은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그런 백제를 다시 위기에서 구해낸 왕이 무령왕 부여사마이다. 백제의 왕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1971년 무령왕릉에서 나왔다. 무령왕릉에서 부장품은 양과 질에서 백제사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교류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 신라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이 있었으나 백제사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다. 


국립공주박물관 기획전시실, 무령
▲ 국립공주박물관 기획전시실, 무령

무령왕은 한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가카라시마 항구 앞에 가면 무령왕 탄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에 되어 있지만 곤지의 아들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일본에 간 곤지는 아들을 낳는데 그가 동성왕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삼근왕 대신 무령왕보다 나이가 어린 동성왕이 먼저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 아닐뿐더러 곤지의 서장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령왕 출토 제기
▲ 무령왕 출토 제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제기들이다. 무령왕릉 널길에서는 여러 제기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제기들은 제대 위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무령왕은 혈통상으로도 불리했지만 고구려에 의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의 권위도 회복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무령왕의 이름은 부여씨에 사마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사마는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본서기 웅략 천황 5년에 무령왕의 탄생설화가 적혀 있다. 당시 백제왕이었던 개로왕이 동생인 곤지에게 일본으로 가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자 곤지는 왕의 부인을 주면 가겠노라고 조건을 거는데 이때 왕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같이 보내준다. 고구려나 백제가 형사처수풍속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억지스러운 것도 아닌 듯하다.
 
귀 달린 항아리
▲ 등잔

일본에 닿을 무렵 한 섬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에게 섬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배에 실어 백제로 보내졌다. 그 아이가 커서 40세의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무령왕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여러 개의 자기잔이 출토되었는데 5점의 등잔 안쪽에는 불을 피웠던 그을음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들기름을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잔들은 백자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청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귀달린 항아리
▲ 귀달린 항아리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이름으로 불려졌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 형태나 재료 등에 따라 이름을 붙여 표기한다. 귀 달린 항아리는 말 그대로 항아리 형태에 귀가 달려 있다. 백제시대의 유물들을 보면 대부분 화려하고 디테일하다. 곡창지대가 몰려 있는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운영된 왕국이라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물자가 풍부했던 것도 사실이다. 왕릉에서 출토된 항아리치고 수수해 보인다.

백제의 기와편
▲ 왕비의 장신구들

왕비 장신구들이 한 군데에 모여 있다. 팔받침부터 귀걸이, 청동 다리미, 금과 은으로 된 장식 주머니칼과 청동 거울, 귀걸이 베개 등을 볼 수 있다. 위태로웠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기다리던 무령왕을 내조했던 무령왕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에 대한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섭다고 했던가. 488년과 490년 중국을 재패하고 공격해오는 북위를 물리쳤던 동성왕은 좌평 백가에 의해 시해된다. 무령왕은 왕위에 오른 다음 해에 좌평 백가 세력을 토벌하고 백가의 목을 잘라 백강에 던져버린다. 

백제의 등잔
▲ 왕비의 신발

왕비가 신었다는 신발로 사실 평소에 신고 다녔다기보다는 국가 행사가 있을 때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의 유물
▲ 무령왕릉의 유물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내부적인 결속을 다지기 위해 많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전쟁광처럼 끝없이 정복욕을 보이는 군주가 있는 반면에 내부를 정리하고 고구려의 수곡 성의 습격과 말갈을 격퇴하는 등 침략에 대비한 무령왕은 바로 민생 안정에 주력한다.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구제하고 농토를 잃고 유랑하는 자들을 귀농시켜 민생 안정을 도모했다. 

백제미스터리의주인공무령기획전시 1

백제가 500년간이나 수도로 삼았던 한성에서 밀려날 무렵 혹독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475년 고구려군에 의해 개로왕이 살해당했고 이어 즉위한 문주왕은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살해당했다. 문주왕의 장자인 삼근왕이 즉위했지만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영웅적 풍모를 가졌다는 모대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동성왕이다. 정권의 가반을 다졌다고 하나 백가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처럼 백제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백제를 다시 반열에 올려놓고 국제관계도 회복시킨 왕이 무령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나왔지만 그중에서 비석이라고 볼 수 있는 묘지석 2개도 함께 출토되었다. 그 비석에는 앞면에 52자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방위가 표기되어 있었다. 앞면에 보면 무령왕이 태어난 462년 (개로왕 8년), 죽은 해인 523년 (무령왕 23년)이 표시되어 있어 발굴된 유물 및 기존 사료들의 신빙성을 검토하는자료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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