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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보령의 작은 섬에 남겨진 최치원의 흔적

2016.09.01(목) 00:05:45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최치원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당나라와 6두품입니다.  신분의 한계로 인해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해 전국을 유랑다녔던 사람이기에 전국 곳곳에 최치원의 흔적이 남겨져 있더군요. 보령의 작은 섬이었던 보리섬에도 최치원이 머물렀던 최고운 유적이 있습니다. 

최고운 유적지
▲ 최고운 유적지

최고운 유적으로 가는길은 지금 한참 공사중인데 공사가 완료되면 접근성은 더욱 좋아질듯 합니다.

보리섬
▲ 보리섬

여름이 이제 기운이 꺽여서 날이 서늘한데요. 신라 말의 혼란기에 세상을 비관하고 전국을 유랑할 때 이곳 보리섬과 성주사를 왕래하여 경치를 즐기면서 시뭇을 짓고 수학하면서 이곳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보리섬 안내
▲ 보리섬 안내

과거 급제 후 율수현위로 재직 중이던 최치원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야망’이 담겨있다는 '격황소서'를 직접 쓰는데요. 이 글 하나로 최치원은 황소를 침상위에서 떨어트렸다는 이야기까지 전하며 당나라에 이름을 떨칩니다.

뻥뚫린 평야
▲ 뻥뚫린 평야

당나라에 그냥 머물러 있어도 좋으련만 최치원은 다시 신라로 돌아옵니다. 최치원은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데요. 그의 나이 스물아홉, 신라를 떠난 지 17년에 다시 한반도를 밟습니다.

그렇지만 최치원은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고 한계를 그어버리는 골품제 사회의 한계로 인해 벼슬길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 유적지 안내
▲ 고운 최치원 선생 유적지 안내

그래서 전국을 유랑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이곳 보령의 한 섬에 머물게 됩니다. 그 섬이 바로 보리섬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무10여조’를 꺼내들었지만 이 마저도 진골 귀족의 반발로 거부되죠. 신분제때문에 기운이 다해가는 신라. 또 다시 유리천장에 부딪힌 최치원은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속세를 떠난 것입니다.

오랜세월의 흔적
▲ 오랜세월의 흔적

사실 최치원은 충청남도가 있는 지역과 인연이 깊은 사람입니다. 경주 최씨의 시조이기도 한 최치원은  893년 (진성여왕 7년)에 부성군 (서산시 지곡면 일원) 태수로 부임하여 서산의 최초 태수가 되었습니다.
 
고운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역임할때 보원사(현 보원사지)에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 가야협 雄州 伽倻峽 보원사는 의상(義湘)을 계승한 십사(十寺)중의 하나' 라는 기록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보리섬의 바위
▲ 보리섬의 바위

원래 바다였던 곳이어서 그런지 사방이 훤히 트여 있네요.

보리섬을 떠나며
▲ 보리섬을 떠나며

현명했으며 지성인이었던 최치원의 가장 유명한 토황소격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대산군.천령군.부성군의 태수를 역임하고 부성군 태수로 부임한 다음해인 894년에는 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개혁안을 제시했던 최치원이 머물렀던 조그마한 섬 보리섬의 여름은 이렇게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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