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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백성을 생각하는 왕의 마음

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2016.06.18(토) 13:53:28 | 천안스토리 (이메일주소:cheonanst@naver.com
               	cheonanst@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평택에서 1번 국도를 따라 안성천교를 지나 천안으로 가다 보면 길가 왼쪽에 보이는 조그만 소나무숲 속이 그 사이에 비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 국보 7호인 천안 봉선 홍경사터 비갈비입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국보 1호는 숭례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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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는 전체높이 2.8m, 1026년, 국보 제7호.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있는 고려시대의 사적비.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귀부와 이수를 온전하게 갖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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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玄宗)이 부왕인 안종(安宗)의 유지를 받든다는 뜻에서 내린 전액 ‘奉先弘慶寺碣記’가 비신 상단에 새겨져 있습니다. 갈비(碣碑)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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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습니다.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답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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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대학자 최충(崔沖, 984~1068)이 짓고 고려조 해서체의 제일인자인 백현례가 쓴 비문에 새겨 있기를 봉선 홍경사는 고려 초 8대 현종(992~1031) 때에 세운 대찰입니다. 

한데 수도인 개경 근방도 아니고, 선종 사찰로서의 심산오지도 아닌, 역원이나 있어야 할 길목에 절집이 있는 것이 이상하죠. 비신에 적혀 있는바, 그 내력은 이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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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환 일대는 삼남에서 한양이나 개경에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게 되는 길목이었습니다.그런데 갈대가 무성하여 도적이 들끓었으니 행인들이 이곳을 지나기를 심히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현종의 아버지는 본래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로 뒤에 안종으로 추대된 사람인데, 평소에 불법을 숭앙하고 법화경을 받들며 절을 이루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현종이 왕위에 올라 생부의 유지를 받들어 이곳에 절을 지을 뜻으로 현종 7년에 착공하여 5년 만인 12년에 200여 칸의 큰 절을 완공하였습니다. 절 이름을 봉선 홍경사라고 하였는데 ‘봉선’이란 ‘선친의 유지를 받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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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절 서쪽에 80칸짜리 광련통화원(廣緣通化院)이란 큰 객관을 지어 행인들이 두루 편리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고려 때의 학자 이규보가 편찬한 『동문선』에서는 이 봉선 홍경사가 설립되었을 무렵에 관해 “200여 칸의 당우에 여러 공덕상을 그리고 봉선 홍경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마치 도솔천과 같이 신비롭고, 종과 탑이 있었다.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어 등이 1,000개나 이어져 켜져 있었다”고 적었으니 당대로서는 어마어마한 절이었던 모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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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갈이 있는 전각 주변에는 당시 절집의 탑이었을 석재들이 깨어져 흩어져 있어 옛 모습이 간 데 없지만 백성을 생각하는 왕의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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