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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백제왕릉서 쏟아지는 예술혼…금동대향로·창왕 사리감

부활하는 백제왕국(7)-부여 능산리고분군

2015.10.28(수) 20:04:15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부여 능산리고분군은 부여읍 능산리 산 15번지에 위치한 해발 121m의 산 중턱에 있는 무덤들로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분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다.

▲ 부여 능산리고분군은 부여읍 능산리 산 15번지에 위치한 해발 121m의 산 중턱에 있는 무덤들로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분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다.



1993년 12월12일.
능산리 고분군을 찾은 관람객들을 위한 주차장을 넓히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인부들은 공사를 서두르느라 손길이 바빠졌다.

그러던 중 물웅덩이에서 섬유조각이 발견됐다.

“(긴급) 모두 공사를 중단하시오”

사람들의 손길은 스틸사진처럼 일순간 정지됐다. 이어 발굴팀의 섬세한 손길이 아래로 내려가자 진흙 속에서 우리나라 공예사의 역사를 다시 쓰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발견된다.
높이는 64㎝.
 

백제왕릉서쏟아지는예술혼금동대향로창왕사리감 1


머리를 들어 올린 용을 받침으로 삼아 피어나는 연꽃 위에 봉래산이 솟아 있고 그 꼭대기에는 봉황이 한 마리 앉아 있다.

향로의 뚜껑 부분을 이룬 봉래산은 예로부터 동해의 신산(神山)을 상징하는 의미로 그 부분이 신선의 세계임을 표현한 것이다.

74개나 되는 산봉우리 사이사이에는 온갖 진기한 기화요초와,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등 실재하는 짐승과 상상의 짐승들 39마리가 조각되었다. 사람도 16명이나 있다.

봉황의 아래쪽에는 악사 다섯 사람이 빙 돌아가며 앉아 천상계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입체적인 부조인 악사들 바로 뒤에 작은 구멍을 뚫어 향이 피어나오도록 했다.

또 산 골골마다 숨은 듯이 있어 낚시를 하는가 하면 머리를 감거나 사냥을 하는 신선들은 그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

몸체는 피어나는 연꽃 모양으로 사이사이에 두 사람과 물고기 등 수중생물 26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런 몸체를 고개를 바짝 쳐든 용 한 마리가 세 발을 틀어서 굳건히 받치고 있는데, 한 발은 번쩍 쳐들어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보여 준다.

이렇듯이 여러 상징들로 만물의 생명이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불교의 연화화생관을 이루고, 한편으로는 음의 정점인 수중세계의 용, 그 위의 지상세계, 다시 천상세계로 나누어 양의 정점인 봉황에 이르기까지 동양 전통의 음양설을 적용하여 하나의 우주를 이루어 내고 있다.

봉래산(중국식으로는 박산) 향로는 중국에서는 이미 한나라 때부터 만들어져 왔으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정교하고 섬세하며 상징적인 향로가 만들어진 예는 없다.

7세기 초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향로는 백제 사람들의 사상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사상을 이처럼 섬세하고도 자신 있게 조형적으로 형상화해 낼 수 있었던 백제 문화와 자신감을 우리에게 새삼 일깨워 준다.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곳이 바로 능산리 고분군(백제왕릉원)이다. 정확히 말하면 능산리사지 서쪽 공방터와 능산리고분군 사이에서 발굴됐다.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릉묘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성(羅城)의 동쪽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부여읍 능산리 산15번지에 위치한 해발 121m의 능산리산의 중턱에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분군은 동쪽·서쪽과 중앙에 각각 무리를 이루어 모두 3군 16기로 분포되어 있는데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중앙의 전(傳) 왕릉군 7기이다.

이 가운데 중앙 구역에 위치한 무덤들이 그 크기나 위치로 보아 사비시대 역대 왕들의 왕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고분군의 입지는 전통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 지세와 잘 일치되어 있어 백제 당시에 이미 풍수지리사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이래 여러 차례 조사되었으나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옻칠과 금박(金箔)으로 장식된 관(棺)의 파편만 남아 있었다.

능산리고분군은 횡혈식(橫穴式·석재를 이용해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널방 벽의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 봉토를 씌우는 방식) 석실묘의 구조를 지녔다. 이는 중국에서 유행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구조면에선 더 진화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백제인들이 선진문물을 자신들의 기법으로 다양화시켰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에서 나성쪽 중간 부분에는 백제시대 절터인 능산리 사지가 발굴되었다. ‘백제창왕 사리감’도 이곳에서 출토됐다.

사리감이란 부처의 사리를 담은 사리 용기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작은 감실(龕室)을 말한다.
사리감의 크기는 높이가 74㎝이며,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50㎝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모습은 밑면이 납작하고 윗면은 둥근 아치형이며, 사리기(舍利器)를 안치하는 감실의 모양도 사리감의 외형과 동일하다.

감실은 높이 45㎝, 너비 23.5㎝이며 깊이는 25.5㎝이다. 발견 당시 감실의 내부에 봉안되었던 사리기는 없었는데, 아마도 목탑이 파괴될 당시에 같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사리감 표면의 좌우에 각각 10자의 명문이 음각(陰刻)되어 있다는 점이다.

명문의 내용은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로, 백제 창왕 13년인 정해년에 그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 위덕왕)에 의해 567년 만들어졌으며, 성왕의 따님이자 창왕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리감은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누구인지 밝혀져 있고, 절을 창건한 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띠고 있다.
●백제왕릉원(041-830-2521)
/김태신 ktx@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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