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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다문화 가족 '큰 언니'로 '우뚝'

인도네시아에서 온 '대찬여성, 멋진엄마' 스리하자티

2015.09.24(목) 17:36:14 | 온양신문 (이메일주소:kimkim3347@gmail.com
               	kimkim3347@gmail.com)


한국인 신랑에 반해 한국으로 시집온 지 12년
4개 국어 구사하며 이주여성들의 대변인 역할
고향이 그리운 이들을 위해 인도네시아 음식점 오픈
아버지 교훈 받아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겠다.


화교인 할머니 할아버지와 인도네시아인 어머니 아래 태어난 스리하자티(69년생).

한국인 신랑에 반해, 한국으로 시집온 지 12년된 스리하자티

▲ 한국인 신랑에 반해, 한국으로 시집온 지 12년된 스리하자티


인도네시아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4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손꼽히는 엘리트였던 그녀가 사랑을 찾아 떠난 아산에서 이주여성으로 살아온 이야기는 그자체가 드라마다.

스리하자티는 아산의 이주여성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산업인력공단 전문통역사, 아산이주여성연대 부대표, 아산외국인 치한봉사단장, 선문대 인도네시아 강사 출강, 프리랜서 번역사, 무역회사(홍성) 일을 맡고 있으며, 얼마 전 온천대로에 인도네시아 음식점을 열어 고향생각 간절한 외국인 근로자들의 향수병을 달래주며 직업이 하나 더 늘었다.

스리하자티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음식점에는 이주여성들의 아지트였다.
각계 각국의 여성들이 스리하자티에게 의지하고 한국생활에 대한 조언과 위로를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 전 아기 낳았다는 캄보디아 여성도 언니에게 아기 구경 시켜주려고 찾아왔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영리했던 스리하자티는 인도네시아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한약방 집의 막내딸이었던 그녀에게 아버지는 큰 스승이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는 학교 수업과 학원 교육을 병행시켰고, 아버지만의 특별한 교육도 혹독하게 시켰다고 한다.

스리하자티의 오빠는 98년부터 연수생 인력사업을 시작했고, 오빠의 해외인력사업을 돕던 스리하자티는 한국연수생으로 지원한 14명 중 한 명인 남편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스리하자티와 남편은 언어의 장벽으로 만나도 서로 사전 찾느라 바빠 몇 마디 못하고 헤어지곤 했다고 한다. 2년을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오고가며 사랑을 키워가며, 스리하자티는 마침내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국가인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급한 성격과 음주문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며 주변사람들 모두가 결혼을 만류했다.

특히 한국인을 많이 상대하는 스리하자티의 오빠는 심하게 반대를 하고 나머지 가족들도 반대가 무척 심해 결혼 전날까지 가족들을 설득시키지 못한 스리하자티는 홀로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스리하자티는 아산의 이주여성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스리하자티는 아산의 이주여성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홀로 시작한 한국 생활
타국에서 가족들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생활을 시작한 스리하자티는 한국문화에 대해 전혀 모르는 채 시부모님들까지 모시며 신혼을 시작한다.

결혼한 다음날부터 스리하자티는 많이 울었다고 한다. “남편 하나 믿고 한 결혼이었는데 회사에 간 남편과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었고, 시어머니와 둘이 집을 지키는 게 그 시절엔 전부였다. 게다가 가전제품도 한글로 써 있어서 사용할 수 없었고, 요리도 할 줄 아는 것은 카레뿐 이었다. 가족들이 나 때문에 한동안 카레만 계속 먹었다”고 설명하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식모들을 부리며 살았다. 그러니 살림에 대해 전혀 몰랐다. 직접 방 한번 치워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고 설명하고 웃는다.

시어머니와도 의사소통이 전혀 되질 않았다. 남편이 만들어 준 단어집으로 (영어와 한글을 같이 써놓은 카드) 시어머니와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스리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아이를 가져서 그 시절 먹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경제권을 가진 시어머니가 주는 20만원의 생활비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리하자티의 친정에서 많은 돈을 보내주어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용돈도 쓰면서 여유 있게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이 매달 보내주는 용돈받기가 미안했던 스리하자티는 부업을 시작한다. 부품 조립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한 달에 겨우 팔 만원을 벌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부업을 하던 스리하자티는 납품 기일을 잘 지켜 업체와 또 다른 계약을 하게되고 사업 수완이 좋은 스리하자티는 아파트 경로당을 임대해 부업을 받아오고 아파트 사람들을 모아 일을 나눠주는 관리자가 되었다.

사업가 체질
사업가 집안에서 자라서일까? 생활력이 강한 스리하자티는 살림하며, 아기를 키우며, 바깥일도 열심히 해 돈을 긁어모았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남편과 반반씩 내고 구입한 것이라고···

다문화 가정 방문선생님이 집에 오셔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던 스리하자티는 언어를 익히자마자 부업일을 접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주여성들에 비해 월등히 학력이 높았던 스리하자티는 다문화센터와 한국인력공단 통역으로 입사했다.

스리하자티가 말하는 통역사라는 직업은 “외국인들과 한국사회에서의 징검다리라고 표현한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고충을 잘 알기에 통역사 없으면 수술을 안 해준다. 그래서 통역사는 위험성과 주의사항을 알려야하기 때문에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고 한다.

현재 인도네시아 통역은 스리하자티가 유일하다. 경찰서부터 법원까지 평택, 홍성, 대전에서의 통역 일까지 맡아서 하고 있다.

아산외국인 치한봉사단장을 맡고 있는 스리하자티

▲ 아산외국인 치한봉사단장을 맡고 있는 스리하자티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 전 인도네시아 음식점을 오픈했는데 하는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리하자티는 “외국인 지원센터에서 5년 동안 봉사하며, 많은 이주여성들을 만났다. 하지만 이주여성들은 취업이 매우 힘들다.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외국인이라고 취업을 못하고 계속 거절당해서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에 가게를 열었다”며 외국인을 환영하는 회사가 없어, 자신이

직접 아산지역 외국인들을 고용해서 쓰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스리하자티는 다문화센터에서 알게 된 이주여성들을 도우며, 맏언니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필리핀 동생들이 식당을 열게 되었을 때도, 아버지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수혜자만 되지 말고 자립하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놓고 동생들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발 벗고 도왔다.

스리하자티 딸은 벌써 12살이다.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나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딸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놀릴까봐, 적응을 하지 못할까봐, 지원받는 부분에서도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할까봐 항상 마음을 졸인다는 스리하자티는 정말 좋은 엄마였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스리하자티는 “어린 시절 엄격한 아버지가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공부만 많이 시키고 쓴 한약을 주는 것도 싫어서 몰래 버리고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버지 방식의 사랑이었고, 자식사랑이 대단한 분이셨음을 딸을 키우며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스리하자티가 딸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기 위해 그 예전에 아버지처럼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모범 외국인 표창

▲ 모범 외국인 표창


이주여성도 한국인
“우리는 피부색은 다르지만, 한국인이 되기 위해 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인정을 해주지 않아 휴대폰을 살 때조차도 주민번호가 있음에도 만들 수가 없고 취업문제도 힘들다”며 아직 외국인 근로자들이나 이주여성들을 100%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문제에 대해 꼬집었다.

스리하자티는 가게 준비기간에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홀로 부동산, 세무서, 보건소 등 서류를 떼러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인은 서류가 당일처리가 되지만 외국인 심사는 까다로웠음을 설명한다.

“일부 사람들은 피부색이 다른 나를 볼 때면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무시하는 일도 있다. 외국인을 물건 취급해서는 안 된다”며 마음이 힘들 때, 몸이 아플 때와 일이 잘 안될 때 부모님 생각과 고향생각이 많이 난다며 울먹였다.

인터뷰 중에 식사 시간이 겹쳐 스리하자티는 여러 차례 자리를 비우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인도네시아 손님들이 몰려 기자가 주문을 받고 서빙을 도왔다. 소통이 되질 않아 메뉴판을 주니 그들이 밑줄을 그어주는 과정에서 12년 동안 스리하자티가 겪었을 한국을 떠올려본다.
아마도 스리가 처음 겪었을 한국도 이랬을 것이다.

스리는 인터뷰 도중 여러 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 이야기, 딸 이야기,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스리하자티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들으면서 기자도 울컥했다.

스리하자티와 오랜 시간 가슴에 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이주여성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대찬 여성, 멋진 엄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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