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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광복70주년 보름전에 찾아간 한용운 생가

2015.07.30(목) 12:08:16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알아도 생가가 어디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에 위치한 만해 한용운 생가는 소박하지만 꽤 넓은 부지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생가는 일부 공사중이라서 조심스럽게 돌아서 들어가야 한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시대에 태어나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시대 막바지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한 인물이 세시대를 산셈이니 그의 인생도 평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가온 광복절을 맞아 한용운 생가를 둘러보는 것은 한국사람으로서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해 한용운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

▲ 만해 한용운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


더운 여름의 열기가 피부속을 파고 들면서 과도하게 땀을 배출하게 만든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한용운은 20대 후반의 나이인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를 하는데 이때는 일본과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을 체결하던 해이다. 교과서에서 많이 본 '님의 침묵'은 1926년에 발표한 것으로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해 한용운이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19년 3.1 독림운동을 이끌면서 부터인데 33인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작성하였다.
 

만해 한용운 사당 올라가는 길

▲ 만해 한용운 사당 올라가는 길


만해 한용운의 흔적은 이곳 홍성뿐만이 아니라 서울, 강원도에도 있다. 서울에는 심우장이 있고 강원도 고성 건봉사는 그가 만화선사의 제자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만해(萬海, 卍海)는 그의 법호(法號)이며 용운(龍雲‘) 이라는 이름은 만화선사(萬化禪師)의 제자가 되었을 때 얻은 법명이다.

방명록도 남기고

▲ 방명록도 남기고


만해 한용운의 초상을 보려면 저 사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전에 결성에서 연세가 좀 있으신 분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지금은 사라진 결산의 한 서원에서 배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만해 한용운은 일찍이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홍성이나 예산, 당진, 서산, 태안등은 내포 문화권에 속하는데 내포문화권에서 적지 않은 인물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해안 지역의 바다가 내륙 깊숙히 까지 들어와서 적지 않은 문물의 교류가 있었고 돈이 돌고 여유가 있었기에 학문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최적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만해 한용운 초상

▲ 만해 한용운 초상


실제 만해 한용운의 사진과 초상을 보면 매우 닮았다.

불교에 귀의했지만 조선시대 말에 무능해진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던 만해 한용운은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의 아버지는 몰락한 양반 사대부 출신으로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관리로 일했기에 집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만해 한용운의 조상으로 멀리 올라가면 그 유명한 세도가인 한명회까지 올라가는데 한명회의 동생인 한명진이 한용운의 조상이다.

공사중인 생가

▲ 공사중인 생가


먼저 사당으로 가서 한용운의 초상을 보고 내려오면서 한용운의 생가를 둘러본다. 공사중이라서 못들어가는줄 알았는데 옆으로 살짝 공간을 두어 들어가 볼 수 있었다. 한용운이 불교에 귀의한 것은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역사의 격변기에 동학운동이나 의병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님은 갔습니다.

▲ 님은 갔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생가는 소박했다.

당시에도 경전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공부를 계속했던 만해 한용운은 불교포교의 대중화를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장경과 화엄경을 비롯한 적지 않은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했다. 한용운은 다른 방식으로 대중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이다. 어떠한 좋은 말씀이 있더라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서유기의 경우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의 모험기 같지만 속내는 깨달음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은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는 소승불교만 저변에 깔려져 있었고 이타적인 가르침의 대승불교는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중생들이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경전(대승불교)를 얻기 위한 고된 모험을 그린 것이 서유기이다. 당시 대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한용운 같은 지식인이 고행의 길을 걸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소박한 초가집

▲ 소박한 초가집


3.1운동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기도 했던 한용운은 사회 단체 활동을 하면서 조국독립에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그가 저항문학에 선두에 선 것은 바로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민족문화의 경지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한 방법이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 동상

▲ 만해 한용운 동상


일본이 본격적으로 태평양전쟁으로 돌입했을때 한용운은 어더한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지냈기에 어려운 생활을 영위했다. 말년에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기도 했던 한용운은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훈련이 있던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만해 한용운은 사후에 경기도 양주군에 안치되었고 그의 생가는 1990년 이곳에 복원된다음 기념관리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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