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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소학리 효자 향덕비를 보며 느끼네요

2015.04.06(월) 23:08:40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주 소학리에 가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된 이곳의 비는 우리나라 기록상 최초의 효자인 향덕의 효행을 가리는 비석이라고 한다. 신라 경덕왕 때 부모가 가난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성을 모셨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 효자의 향덕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소학리 보호수

▲ 소학리 보호수


효자 향덕비보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의 보호수도 상당한 수령을 자랑하고 있다.

소학리 효자 향덕비

▲ 소학리 효자 향덕비


멀리 효자의 오래된 비와 비교적 근시대에 만들어진 신비가 자리하고 있고 두칸짜리 건물이 이를 보호하고 있다.

효자비 안내비

▲ 효자비 안내비


1741년(영조 17)에 세운 정려비의 앞면에는 "지극하여라, 효자여/떳떳한 마음으로 온전함을 이루었으니/이미 허벅지 살을 베었는데/ 또 다시 종기를 빨았도다/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땅을 주고 집을 내리셨다/마을이 효자로서 이름이 났으니/영원토록 그 이름 계속될지어다" 라는 시가 쓰여 있다.
 

영조때 세워진 비

▲ 영조때 세워진 비


이 비는 영조 17년 (1741)에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이 비문을 다시 써서 세운 것이다. 비교적 오른쪽 비에 비해 잘 관리된 듯한 느낌이다. 신비는 전체 높이 160cm로 8각 대석 위에 비신을 하고 있다.
 

구비

▲ 구비


이 비는 왼쪽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윗부분이 잘라져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비의 내용에는 “之閭(지려)”와 “三月日重立(삼월일중립)“ 중 중립이라는 문구가 있어 경덕왕 때에 본래 세운 비는 아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머니를 향한 효심

▲ 어머니를 향한 효심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 무엇을 받기 위해서 행한 것이 아니었지만 향에서는 그 효행을 알고 이 사실을 주에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에게 아뢰니, 왕이 명을 내려 벼 300곡 (1곡은 10두)과 집 한 채, 그리고 토지 약간을 내렸다고 한다.

소향리 보호수

▲ 소향리 보호수


수령이 500년을 훌쩍 넘은 이 보호수는 느티나무로 관리번호 12-5로 관리되고 있다.

너무 수령이 오래되어서 그런지 나무의 한쪽만 간신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나무의 기둥은 상당부분 그 속살을 보이고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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