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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돌에 생명을 불어 넣는 석공예 명장 고석산 선생님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8호(2013년 지정)

2015.03.17(화) 12:06:35 | 남준희 (이메일주소:skawnsgml29@hanmail.net
               	skawnsgml2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석공예의 역사는 인류가 도구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죠.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많은 도구를 만들어 썼는데, 가장 먼저 사용한 재료가 바로 돌, 뼈, 나무 등입니다.

이 가운데 나무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부식하여 없어졌지만, 돌로 만든 작품만이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석공예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석공예가 발달했습니다.
면면히 이어져 온 석공예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돌, 차가운 돌에 생동감 넘치는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의 손이 돌에 닿으면 거대한 돌덩어리가 불상이 되고, 또한 작품이 되어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의 손이 미치면 돌은 이제 이름을 갖게 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게 됩니다.
 

보령 석공예단지에서 만난 고석산 석장 명인

▲ 보령 석공예단지의 작업장에서 만난 고석산 석장 명인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8호(2013년 지정) 충남 보령의 ‘석장(石匠)’ 고석산 선생님.
지난 1968년부터 전통 석공예 분야에 입문해 현재까지 전통 석공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석공예 기법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승해 오신점이 높게 평가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신거라 합니다. 특히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는 충남도내 석공예 분야 전승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무형문화재 지정의 필요성이 크게 있었다고 합니다.
 
고석산 명장님을 뵈러 석공예단지를 찾은 한낮, 주변 석공예 단지의 돌을 쪼으는 망치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지면서 “아, 내가 말로만 듣던 보령 석공예 단지에 들어섰구나”하는 것을 실감나게 해 줍니다.
 
올해 60세가 되신 고석산 선생께서는 어릴적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십니다. 학창시절 누구나 가졌던 꿈, 선생님.
교사가 되고 싶었고 그것도 미술에 관심이 많이 미술교사가 되고 싶었다는 선생에게 석공예가 숙명처럼 다가왔습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캔버스와 붓 대신 정과 망치를 잡았던 것입니다.

일찍이 아버지의 친구였던 김형돈 선생(당시 석공예 최고 기술자)의 수제자이신 정종섭 선생에 의해 석공예에 입문하게 되셨다네요.
 

오로지 수공으로 불상 제작에 여념이 없는 고석산 선생님.

▲ 오로지 수공으로 불상 제작에 여념이 없는 고석산 선생님.
 

한치의 오차 없이 망치로 정을 때리는 모습

▲ 한치의 오차 없이 망치로 정을 때리는 모습
 

이렇게 일을 하다 보면 망치가 정이 아닌 손등을 때리는 경우도 있어서...

▲ 이렇게 일을 하다 보면 망치가 정이 아닌 손등을 때리는 경우도 있어서...


그렇게 시작한 석공예지만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망치질을 하다 보면 실수로 정이 아닌 손등을 때리는 경우도 생기겠죠.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렇게 손에 시퍼렇게 멍이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단 한번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외길을 걸었습니다.
 
고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석공예 일을 ‘돌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돌밥을 먹은지 3년만에 전국대회에 입상해 이름을 알렸고, 전국기능경기대회 석공예부문 입상과 미술대전 특선 등 이제는 뗄라야 뗄 수 없는 석조각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불교미술전람회 등 다수의 전람회에서 수상하였고, 1997년 대한민국 석공예 최고봉인 명장의 칭호에까지 올랐으며, 미술대전 초대작가에 이어 석공예심사장,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1999년에 고선생닌이 제작한 충남 공주 운천석재 약사여래불

▲ 1999년에 고선생님이 제작한 충남 공주 운천석재 약사여래불
 

고선생닌이 제작한 대각사 쌍사자석

▲ 고선생님이 제작한 대각사 쌍사자석
 

고선생님이 제작한 미륵불

▲ 고선생님이 제작한 미륵불
 

고선생님이 제작한 석가모니불

▲ 고선생님이 제작한 석가모니불
 

강원도 양양의 휴휴암 불상 제작당시

▲ 강원도 양양의 휴휴암 불상 제작당시
 

휴휴암을 만들때 ㅏㄱ업중인 모습

▲ 휴휴암을 만들때 작업중인 고선생님의 모습
 

휴휴암 용왕상 제작당시의 고선생님

▲ 휴휴암 용왕상 제작당시의 고선생님
 

약사여래상을 만드는 고선생님 모습

▲ 약사여래상을 만드는 고선생님 모습


고선생님의 활동 연표는 대략 이렇습니다.
 
1968. 정종섭 선생님 석공예 입문
1980. 제9회 불교미술전람회 조각부문 특선
1981. 제10회 불교미술전람회 조각부문 우수상
1983. 국가지정문화재수리기능자(석공)667호
1987. 서울지방기능경기대회 명장부 석공예 부문 2위
1990. 제 25회 전국기능경기대회 명장부 석공예부문 2위
1992. 문화재수리기능자(석조각)1303호
1997.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선정
1998. 충남지방기능경기대회공예분과장 겸 석공예심사장
2005. 충남 지방기능경기대회 석공예 보령 유치위원장
 
선생께서는 강남 봉은사 미륵대불설계와 울산보림사 지장보살, 동화사 약사대불 병풍석 등 미술사에 길이 남을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는데 널리 알려진 강원도 양양 휴휴암의 지혜관세음보살상은 선생의 작품 중의 하납니다.
 
그 후 뜻을 같이하는 석공예인들과 함께 한국석조각예술인협회 창설을 주도했습니다.

“내 석공예가 알려지고 작품이 우수하다는게 매스컴 같은데를 통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마자 내가 만든 작품이 일본에까지 수출되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나는 돈을 쫓지는 않았습니다. 돌을 만지는 일이다 보니 여간 힘든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편하게 기계를 사용해 작업을 하면 빨리 많이 만들고 돈도 벌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안해요 수공만을 고집합니다.”

기계로 하는 석공예는 안한다는 고선생님.
정으로 쪼으면 편안하게 생각한대로 작업을 할 수 있으니까 안정감 있고 예술적 맛이 나기 때문이라 합니다. 기계는 왠지 차갑고 작품에 혼이 없는것 같고 생명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라시네요.
역시 명장이십니다.
 

앞으로 석공예 조각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키우고 싶다고 하십니다.

▲ 앞으로 석공예 조각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키우고 싶다고 하십니다.


“앞으로의 꿈요? 아... 실현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석공예분야에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봉의 반열에 계시므로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여쭈었더니 약간 한숨부터 쉬십니다.
후학을 키워야 하는데 여의치 않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석공예를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학교를 세워 사람들을 키우고 싶어요. 세계인들이 찾는 석공예 관광 코스를 만든다는 것이 포부입니다. 장차 국가를 이끌어 갈 최고의 석공예 전문가를 배출하기 위해 내 재주를 아끼지 않고 싶어요. 헌데... 석공예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값싼 중국산 때문에 석공예로는 밥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나를 따르는 몇 안되는 휴계자들이 있는데 앞으로 이 사람들에게라도 내 기술을 죄다 전해주어야겠지요”
 
일명 ‘조각 학교’를 세워 후배를 키우고 싶어하시는 고석산 선생님.
그 꿈이 꼭 실현되고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유산인 석공예의 뿌리와 맥이 잘 이어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묵묵히 차가운 돌을 쪼으며 생명을 불어넣고 계신 고석산 선생님, 소중한 석공예 보존과 후학양성, 꼭 실현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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