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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온유의 리더십… 역경도 이기다’

고불 맹사성 선생기념 사업회 평전 발간 출판기념회

2014.11.19(수) 13:21:10 | 온양신문 (이메일주소:kimkim3347@gmail.com
               	kimkim3347@gmail.com)

고불 맹사성 사상 학술발표회

▲ 고불 맹사성 사상 학술발표회

고불 맹사성에 대한 실증적 자료조사와 연구는 1977 맹온재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맹사성은 대중적 교양서 작가들의 관심인물로 부각되었으며 전기, 구전을 통해 민족 모두가 잘 아는 선현이지만 오늘날까지 깊은 연구와 학술에 대해선 많지 않았다.

18일, 아산 그랜드호텔 2층에서 고불 맹사성 기념 사업회 주최로 ‘고불 맹사성 평전’ 출판기념 학술 발표회가 열렸다.

이흥복 회장은 “고불 맹사성의 생애와 사상은 6여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평전을 완성하게 되어 책으로 발간하게 됐다. 뜻있는 인사들은 맹사성의 고귀한 정신과 덕을 기리기 위해 행사와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고, 고불 맹사성 숭모제와 함께 온양문화원에서는 청백리, 맹사성 상을 만들어 선양 개발하고 있다. 출판을 지원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는 인사말을 했다.

이어 이흥복 (충무회회장), 김기승(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장), 박찬규 회장의 감사패 수여와 김기승 교수와 김일환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연구실장)교수의 발표가 있었다.

고려 말의 명문가 신창 맹씨로 고려 말기의 문신 맹희도의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장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였다. 호는 고불(古佛)이며, 이는 오래된 부처라는 뜻으로, 아버지를 높여 부르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린 맹사성은 10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의 시묘 생활을 했고, 어려서부터 대학자 권근을 스승으로 섬겨 ‘시경’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 알려진다. 27세에 장원급제로 관직에 진출해 개혁적 신진 관료로 활동했다.

그렇지만 역성혁명을 전후한 시기 그의 친족과 친지가 정치적으로 실세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조선 왕조 개창 이후 그는 부친과는 달리 다시 관직에 진출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하였고, 태조와 태종 대 초기 관료 생활을 할 때에는 여러 차례 정치적 시련을 겪었으나 탁월한 도덕성과 지혜로운 처신으로, 성실하게 국정에 임한 결과 태종의 신임을 다시 회복하고 세종 대에는 8년간 재상으로 활동해 명재상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맹사성이 보여주는 공인의 자세는 지금도 큰 배울 점이 있다. 평생 벼슬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없었으며, 자기수하의 관리가 잘못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신이 책임을 함께했다.

재상시기에 맹사성은 관인으로 보여준 백관의 사표가 되는, 무릇 공직에 임하는 재상이란 이래야한다는 전범이 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맹사성은 전통음악에 바탕을 두고 중국음악을 수용하여 민족음악을 정립했다. 오늘날 우리의 전통 음악이 중국 음악의 복사판이 아니라 한국적 특성을 갖춘 한국 음악으로 확립되게 된 데에는 맹사성의 역할이 컸다.

그는 음악,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효자, 청백리, 음악가를 넘어 뚜렷한 가치관과 정치철학을 가진 사상가이며 활동가였다.

고결한 도덕적 품성과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지닌 맹사성은 조선 초기 여러 분야에서 우리 역사의 발전에 수많은 업적을 세웠다. 그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우리는 그가 학문적 깊이와 도덕적 가치관을 정치사상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기승(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장)

▲ 김기승(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장)
 

고불 맹사성 사상 학술발표회

▲ 고불 맹사성 사상 학술발표회
 

고불 맹사성 사상 학술발표회 감사패 수상자

▲ 고불 맹사성 사상 학술발표회 감사패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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