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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오늘, 청양 의병대장 민종식 선생이 시형언도 받은 날

예산의 수당 이남규선생이 민종식 의병대장을 숨겨주다 일제에 피살당했다는 사실

2014.07.04(금) 01:33:30 | 최순옥 (이메일주소:didrnlwk55@hanmail.net
               	didrnlwk55@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충남넷에 자주 기사로 소개되신 수당 이남규선생이 계십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일경에 체포돼 가시면서도 사가살 불가욕(士加殺 不可辱 : 선비를 죽일수는 있어도 욕보일수는 없다)면서 일제에 저항하신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기사를 쓰는 분은 사실 이남규 선생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의병대장이셨던 청양의 민종식 선생에 관한 것입니다.

민종식 선생 기사를 쓰는데 수당 이남규 선생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두분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있으시고, 특히 두분은 처남 매부지간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짜상으로 정확하게 1907년 7월3일은 민종식 선생께서 일제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은 날이기 때문에 선생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사를 쓰기에 꼭 필요한 날입니다.

미리 밝혀두지만 선생께서는 다행히 특사로 풀려나 사형은 면하셨고, 이후 출옥후에도 끝까지 의병을 모집해 독립투쟁을 하시다가 삶을 마치셨습니다.
 
제가 최근에 각각 민종식 선생의 발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청양에 있는 선생의 옛 생가와 추모비, 그리고 예산의 수당 기념관을 함께 돌아보고 왔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민종식 선생이 어떻게 항일 투쟁을 하셨는지 보겠습니다.
 

홍성의 홍주의사총 앞에 그려져 세워진 홍주성 전투도

▲ 홍성의 홍주의사총 앞에 그려져 세워진 홍주성 전투도


1895년 10월 8일 명성왕후가 일제의 칼에 무참하게 살해당하자 홍성의 기호유림 거두 김복한, 안병찬 선생 등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의병장으로 추대하려 했던 홍주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체포당해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얼마 후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제1차 홍주의병)

그후 1905년에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은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당시 청양의 안병찬 선생은 “모든 권한을 일제가 쥐고 있는데 천장 만장의 상소를 올려본들 뭣하랴” 하면서 의병을 모았다고 합니다.(2차 홍주의병의 시발)
 
이어 그는 당시 고향으로 낙향해 있던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 선생을 찾아가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다시금 의병의 깃발을 들었던 것입니다.
 

유허비 전경

▲ 유허지 전경


 

측면에서 본 유허지

▲ 측면에서 본 유허지


이렇게 의병장이 된 민종식 선생은 일제와 친일매국 대신들을 성토하는 통문을 각처로 발송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도 호소문을 보내 국권회복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홍주성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동참할 것으로 믿었던 홍주군수 이교석이 성문을 닫고 저항하자 공주를 점령키로 하고 계획을 바꿔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최신식 무기로 중무장한 채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3월 17일 새벽 청양군 화성면 합천에서 패배, 많은 의병들이 죽임을 당하고 체포되는 비운을 맞이했습니다.

유허지에서 200m쯤 떨어진 산기슭의 민종식 선생 고택. 현재는 다른 분이 살고 계시며 고택 복원은 안돼있습니다.

▲ 유허지에서 200m쯤 떨어진 산기슭의 민종식 선생 고택. 현재는 다른 분이 살고 계시며 고택 복원은 안돼있습니다.
 


이때 다행히 전주로 탈출했던 민종식 의병장은 또다시 의병을 구합해 제2차 홍주의병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5월3일부터 전투를 시작해 19일에 마침내 일본군을 격퇴하고 홍주성을 접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제는 5월 21일부터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 왔고 치열한 접전과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1906년 5월 31일 새벽, 의병은 일본군 화력을 당할 수 없어 결국 패하고 맙니다. 이때 민종식 등 약 100명은 성을 탈출했는데 그가 숨은 곳이 바로 예산의 수당 이남규선생 댁입니다.

이남규 선생은 민종식 선생의 처남이었습니다.
 

의병대장 민종식 선생의 몸을 피신시켜 함께 했던 그의 처남 수당 이남규 선생.

▲ 의병대장 민종식 선생의 몸을 피신시켜 함께 했던 그의 처남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


고택 내부

▲ 고택 내부


이렇게 이남규 선생이 민종식 선생을 숨겨주고, 홍주지역에서 제3의 항일 의병의 구심점이 되어가자 결국 거기에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1907년 9월에 이남규 선생의 집을 급습하였습니다.

그 길로 이남규 선생은 압송도중 일본군의 회유를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잔인하게 피살되셨던 것입니다.
 

이남규선생 고택 옆의 기념관

▲ 이남규선생 고택 옆의 기념관


기념관 내 전시실

▲ 기념관 내 전시실


선생의 흉상

▲ 선생의 흉상
 

 선생의 유품

▲ 선생의 유품


이후 민종식 선생은 공주로 피신했다가 11월 20일 일제에 붙잡혔고, 1907년 7월3일(바로 오늘) 사형 언도까지 받았으나 이후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융희 황제의 즉위 기념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 후에도 의기를 꺾지 않고 의병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17년 6월26일, 마침내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부에서는 그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했고 현재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는 선생이 살던 고택과 유허비가 있습니다.
 
충남넷 독자 여러분.
다음에 혹시 이남규 선생 기념관과 고택에 가시거든 민종식 선생도 함께 관심 갖고 그 뜻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청양에는 민종식 선생의 고택과 유허비도 있으므로 기회가 되면 들러 보세요. 이제 광복절도 한달 열흘밖에 남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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