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이 개인적 야망을 위해 가야사를 불태운 후 지은 절
▲ 보덕사 스님들이 기거하시는 요사채
▲ 극락전
▲ 비구니 스님들이 수도 정진하는 선방채
▲ 선방채의 오래 된 부엌 문
▲ 선방채에 그려져 있는 사천왕 탱화
▲ 선방채 출입문
▲ 스님들의 털신. 뒷꿈치 부분을 헝겊으로 기운게 인상적입니다.
보덕사는 사찰 경내 뒤쪽에 극락전이 있고 그 앞으로는 ‘ㄴ’자 형태의 선방채(비구니 스님들이 정진 수도하는 곳)와 평면 구조의 ‘튼 ㅁ’자형을 요사채로 이뤄져 있습니다.
▲ 극락전 안의 금동불상
▲ 극락전 안의 범종
▲ 극락전 안에 있는 불화
▲ 기둥에 걸려있는 목탁
보덕사 극락전은 시도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안에는 금동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대개의 절에는 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보덕사에는 부처님이 한분만 계시더군요.
문화재자료 제17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보덕사 삼층석탑 역시 가야사 터에 있었던 것이라 합니다. 절이 불에 타고 세월이 흐르면서 적잖게 훼손이 되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온전한 모습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2층의 기단과 그 위에 탑신을 올려놓은 형태인데 처음에는 5층탑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을 보니 그나마도 일본인이 일제 강점기에 밀반출하려던 것을 가까스로 회수하여 다행히 이곳에 보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석등 겉면에 부조된 사천왕상
문화재자료 제183호인 이 석등은 등 표면에 거칠기는 하지만 사천왕상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상당부분 망가져 가운데 등탑의 불빛을 밝히는 부분만 옛모습이고 등탑과 등받이 부분은 근래에 만들어 세운 모습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일부라도 남아 있기에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도민리포터는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영화를 누리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던 현장을 가 보기로 했습니다. 궁금해서요.
▲ 남은들상여(남은들喪輿) 보호각
▲ 보호각 안에 있는 흥선대원군 아버지를 이장해 온 상여(진품은 서울 고궁박물관에 있고 이것은 재현품)
보덕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시신을 싣고 온 상여를 당시 모습대로 재현해 만든 남은들상여(남은들喪輿)가 보호각 안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입니다.
그리고 실제 남은들상여 원형은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라 합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남연군은 순조 22년(1822)에 죽었는데 당시 이곳으로 이장을 하고 난 그 다음 해에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 : 후일 고종으로 즉위함)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여의 제작은 1840년과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상여는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가 있는데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보다는 조촐한 모습이지만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따라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숙종 대의 ‘청풍부원군 상여’와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닌 자료라 하네요. (문화재청)
▲ 남은들 상여 바로 앞의 남연군 이구의 묘
▲ 묘에서 내려다 본 불타 사라진 가야사 터
▲ 문화재 발굴을 위해 복원한 가야사지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이렇게 실제 이구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아래에 불에 타서 사라진 가야사 터가 덩그러니 있습니다.
충청남도에서 문화재 발굴과 옛 흔적 복원을 위해 공사했던 기록을 남기기 위해 ‘가야산 가야사지’라는 안내판을 세워 놓았습니다.
스산한 겨울바람 속에 황량한 느낌만이 감돌면서 그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가 묘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한가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역사를 보면 두고두고 안타까운 ‘만약’이라는 단어를 꼭 떠올리게 합니다.
보덕사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277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