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를 놓고 볼 때 구한말 전국적으로 극심한 박해를 받아 많은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다를 통해 기독교가 일찍 들어왔던 서해안 내포지방은 그 순교의 규모나 숫자 면에서 다른 지역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고 합니다.
▲ 해미순교 성지(여숫골 성지) 전경
서산에 ‘해뫼’라 불렸던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관청이 있었던 곳으로 내포 지방의 해안과 육지를 수비하는 큰 행정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병마절도사는 고을 현감을 겸임하면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대량 처형하는 아픈 역사를 쓴 것입니다.
▲ 안쪽에서 바라본 성지 전경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선시대 천주교 탄압은 실로 가혹하기만 했습니다.
병인 대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000여명이 넘었다는군요.
그런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순교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곳이 해미순교성지입니다.
▲ 여숫골 입석
이곳은 여숫골 성지라고도 불리는데 여숫골의 의미가 참 의미 있습니다.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때 교인들이 기도할 때마다“예수, 마리아”라고 하는 말을 주변의 주민들이 “여수머리”로 알아들었다는군요.
그때부터 여수머리가 되어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 되었다 합니다. 그만큼 순박했던 사람들인데 참 어이없이 죽어갔습니다.
순교성지 곳곳에서 당시의 참혹상과 슬픈 역사가 묻어납니다.
▲ 자리개돌
자리개돌입니다.
신자들을 돌다리에 잔인하게 매질 하는 태형으로 순교케 한 돌다리인 자리개돌은 1956년에 찾아내어 서산 성당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1986년에 원래 위치를 찾아 서문 밖으로 다시 옮겨 놓았으나 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다시 이곳 해미성지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네요.
▲ 생매장터 '진둠벙'
생매장터 ‘진둠벙’입니다.
당시에 1000여명을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수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생매장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되고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 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팔을 뒤로 묶인채 끌려가던 교인들을 그대로 둠벙에 밀어 넣어 익사시켰다고 합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마을 사람들 입에서 “죄인둠벙”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그 말이 축약되어서 “진둠벙”으로 바뀐거라 합니다.
▲ 무명순교자 묘
무명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묘입니다.
이렇게 묘의 봉분은 덩그러니 하나 분이지만 당시에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라 합니다.
▲ 기념관 외벽 부조
순교기념전시관 외벽의 부조입니다. 순교자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당시의 처절하고 참혹했던 상황을 잘 표현하는듯 합니다.
▲ 순교자 돌무덤
그밖에 순교자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순교자의 숫자를 형상화 한 돌 무덤, 자리개돌 처형장면 조각, 순교자들의 행적과 초상을 그린 병풍 등이 있습니다.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공부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 서해안 역사와 내포지역 문화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들로 봐야 할 곳입니다.
해미순교성지(여숫골 성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