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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문화강국 백제의 자존심 백제금동대향로

최고의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2013.08.10(토) 12:04:11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백제의 유물 중 최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백제금동대향로)]'를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어디서 어떻게 발견되었을까요?
계룡도령이 그 이야기를 해 보려합니다.
^^
 
동아시아 전역 아니 전 세계에 걸쳐 최고의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백제금동대향로)]' 는 7세기 초 백제의 금동향로인데 크기는 전체 높이 64cm, 지름 20cm로 1400여년 전 백제, 금동향로를 제작한 금도금술은 현대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다고 하며 백제의 금속공예 기술 중 몸체와 뚜껑에 우뚝 서 있는 봉황의 속을 공간으로 비워낸 밀납법과 금, 은을 수은으로 아말감화하여 도포한 후 가열하여 수은을 휘발시켜 도금을 하는 아말감 도금법을 이용하여 완성된 찬란한 외관을 보여주는 백제의 금동향로는 공예기술의 우수성만이 아니고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생활상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 받침과 뚜껑이 있는 몸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부적으로는 뚜껑장식(蓋頂部裝飾)인 꼭지, 뚜껑(蓋身部), 몸통(身部), 받침(臺足部)의 4부분으로 나누어지며 각각 따로 주조하여 결합한 것으로 몸통은 아름다운 연꽃잎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연꽃잎들에는 두 신선과 날개가 달린 물고기와 사슴 등 26마리의 동물들이 조각되어있고, 뚜껑의 꼭대기에는 턱 밑에 여의주를 끼고 있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앉아 있으며, 봉황 바로 밑에는 5인의 악사(樂士)가 각각 피리, 비파, 소(簫), 거문고, 북을 연주하고 있는데 그 밑으로 74곳의 산봉우리가 솟아 있는 형태인데 산중에는 상상의 날짐승과 길짐승을 비롯하여 실재의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악어 등 39마리의 동물이 11인의 신선과 함께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문화강국백제의자존심백제금동대향로 1

 
6세기 후반, 위덕왕 때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고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백제 미술사와 고고학의 최대 성과라고 불리는 이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어떻게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었을까요?
 
1993년 12월 12일 백제금동대향로는 원래 능산리 고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건설하던 곳에서 450여 점의 유물과 함께 의도적으로 묻어 둔 매납[埋納]의 형태로 칠기로 만들어진 장방형 목곽수조 안 바닥 진흙 속에서 공기가 통하지 않는 진공상태와 유사한 환경에서 거의 녹도 슬지 않은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고, 이어 부여 능산리 절터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되었으며 절터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식의 가람 배치를 하고 있고 목탑은 금당과 함께 이중 기단 위에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목탑터에서 중요한 사료인 사리감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찾아낸 이 사리감에는 모두 20자의 글씨가 각자(刻字)되어 있으며 사리감의 명문 내용으로 이 절은 백제 왕실에서 발원한 기원사찰 또는 능사로서 AD 567년에 세워졌고, 그 후 백제의 멸망과 함께 이 절도 폐허화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능사(陵寺) 터에서는 뭔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능사를 복원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에서 또 다른 유물이 발견되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친 욕심이겠죠?
^^
 

문화강국백제의자존심백제금동대향로 2


부여에서 논산으로 향하는 국도변에 위치한 백제 말기의 왕릉 고분군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사적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는 능산리 고분군은 모두 3개의 고분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왕릉으로 전하는 7기의 고분을 중심으로 동쪽에 5기가, 서쪽으로 수 기가 분포되어 있습니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주요한 내용물들은 사라지고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는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된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과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출토된 덕분에 다시금 주목받게된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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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능산리 고분군에는 다양한 고분들이 발견되었는데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고합니다.
 
일제시대인 1915년부터 발굴 조사가 실시된 이후 계속해서 이 고분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왔고, 최근에는 백제 고분의 모형관이 설치 운영되고 있는데 백제 고분의 표본적 전시장이라 하겠습니다.
 
능산리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며 내부는 굴식돌방무덤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모형을 만들어 백제 기단식 적석총에서 옹관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덤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으며 내부공간에는 이곳 능산리에서 출토된 유물과 관련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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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이 백제왕릉이라는 근거는 공주읍지인 '구공산지'에 "관아동십리허유왕릉[官衙東十里許有王陵]"이라는 기록과 이곳을 "능뫼"라고 부르는 지명에서 찾을 수 있겠는데 제후니 토호의 무덤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문화강국백제의자존심백제금동대향로 5


출토 유물은 목관편 철정 좌금구 금박편 등이 조금씩 수습되었는데 단 하나로 그동안의 백제 유물의 모든 것을 뛰어 넘는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어 고고학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발굴이 되고있습니다.
 

문화강국백제의자존심백제금동대향로 6

 
백제 금동향로는 불교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와 도교의 신선세계(神仙世界)을 표현한 박산향로(博山香爐)의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있다고 하며 바다를 상징한다는 승반(承盤) 위에 한 개의 다리를 가지고, 그 위에 중첩된 산봉우리가 있는 동체를 가진 향로로 신선사상이 조형적 배경이 되어있어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선으로, 그리고 동물들도 현실세계의 동물이라기보다는 신비의 이상향에 살고 있다는 상상의 동물들로 보는 것인데 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향로 중 조금 더 잘 만들어진 하나의 향로일 수 있는 것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결부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일본 최고의 찻사발이 바로 한국의 막사발이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제 이 시대에 우리가 보기에 그렇긴하지만 당시 백제인들에게는 그저 냄새를 제거하거나 아니면 종교의식에 향을 피웠던 도구로 생활의 필수품이었을 수도 있는데 당시의 사람들의 문화나 기술력을 무시하다 발견하게되니 놀라워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을 담아 신성시시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향로에서 악어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악어를 상상의 동물로 볼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향로가 사실 한반도에서 만들어 졌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악어가 사는 지역에서 일상의 동물들과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한 동물들을 새겨 넣었거나 우리가 그 동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상상의 동물로 치부해 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가 한반도내의 작은 공간만 차지한 나라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요즘 하나 둘 드러나는 지명들을 보자면 백제나 신라 고구려의 맞지 않던 지명들이 밝혀지고 있는데 이는 친일 사학자의 의도적인 역사왜곡, 즉 모든 역사를 한반도 내로 우겨집어 넣는 작업의 결과 얼토당토않은, 역사적 사실과도 어우러지지 않는 지명과 연계되어 버렸는데 이러한 문제는 곧 하나 둘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
 
빠른 시일내 해상강국 백제의 위상이 바르게 세워지는 그날을 기대해 봅니다.
^^
 

문화강국백제의자존심백제금동대향로 7


능사와 고분군의 배치형태를 보여주는 모형이 만들어져 배치되어있어 한눈에 전부를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는 전시관은 백제를 이해하는데 좀 더 가까이 갈 수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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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무척이나 무더웠는데 한무리의 학생들이 선생님을 따라 이곳 저곳 유심히 관찰하며 탐방을 하는 모습을 보게되었는데 글과 책으로만 보며 암기하던 우리시대의 교육과 달리 실제 현장을 보며 느끼고 이해하며 익혀가는 학습 방법으로의 변화가 한눈으로 보이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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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의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어져 있는데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으로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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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2호 무덤(중하총)의 경우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고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이는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진 상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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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무덤 2기가 보이는데 바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의자왕단’이라는 곳으로 2000년 능산리 고분군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 한 왕이며 그렇게 중국에 있게 되었던 의자왕의 무덤에서 혼을 옮겨 오는 의식을 치르고 의자왕의 가묘를 이곳에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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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에는 현재 정비되어 있는 고분이 7기이고, 외형상 확인되는 고분은 3기이지만 조사가 이루어진 것만도 1915년에 3기, 1917년에 5기 그리고 1937년에 5기가 이미 조사되었고 이후 1960년대에 추가로 수기가 조사되어 발굴 조사된 고분은 십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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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향로가 발견되어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잘 조성된 능사리 고분군은 쉬엄 쉬엄 돌기에 적당하며 곳곳에 쉴 그늘이 많아 더운 여름이라도 둘러 보기에 좋을 듯합니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에게 이곳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박물관을 연계하여 둘러 본다면 우리지역 역사의 현장을 둘러 보는 좋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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