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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의미있는 역사공부 오천성 여행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청년 장교시절 근무하셨던 곳

2013.07.10(수) 11:48:33 | 만석꾼 (이메일주소:rlaakstjr69@hanmail.net
               	rlaakstjr6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해군에 대한 뉴스를 들어보면 해작사라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해군작전사령부를 줄여서 쓰는 단어입니다. 해작사 말고 서해함대사령부라는 말도 종종 듣는데 이 역사 서해를 담당한 해군함대사령부죠.

 이런 개념이 과거 조선시대에는 수군통제사(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 혹은 충청수영청(충청지역 해군사령부) 전라수영청(전라지역 해군사령부)등으로 쓰였습니다. 수군 통제사가 아닌 지방 수영청의 사령관은 ‘수사’라고 불렀다지요. 충청수사, 전라수사 이렇게요.

 충무공 이순신장군 시절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의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오천성은 상당히 의미가 크고 유서 깊은 문화유적입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청년 장교시절에 근무하기도 했던 곳이 이 오천성입니다. 오천성이 충청수영청이었기 때문이고, 당시 충청수영청 오천성은 충청도 서해안 방어의 최고사령부로서 중요한 군사적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오천항 쪽에서 바라본 오천성 왼쪽 성곽

▲ 오천항 쪽에서 바라본 오천성 왼쪽 성곽
 

오천항 쪽에서 바라본 오천성 오른쪽 성곽

▲ 오천항 쪽에서 바라본 오천성 오른쪽 성곽


  비와 햇빛이 오락가락하는 장마철이어서 기분도 울적한 얼마전, 바다와 성곽 답사를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이곳 오천성에 갔습니다.

 성곽 밖에서 둘러보니 왜구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며 꿋꿋이 버텨 주었던 소임을 간직한채 지금도 여전히 성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오천성은 해발 400m 정도의 구릉성 야산에 거북이 모양의 지형을 이용하여 돌로 쌓은 성입니다. 둘레는 1650m이고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중종 5년(1510)에 성을 쌓아, 고종 33년(1896) 군대 처소가 폐쇄될 때까지 서해를 방어하는 성의 역할을 해왔다고 합니다.

동서남북 4개의 성문중 유일하게 남은 서문 망화문

▲ 동서남북 4개의 성문중 유일하게 남은 서문 망화문(안에서 바깥쪽을 향해 본 모습)
 

망화문 밖에서 본 모습

▲ 망화문 밖에서 본 모습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지 왼쪽으로 성곽이 둘러쳐져 있다.

▲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지 왼쪽으로 성곽이 둘러쳐져 있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두었는데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이렇게 서쪽 망화문만이 남아있습니다.

 망화문은 무지개형 입구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깥쪽 바닥에는 문을 만들어 달았던것 같은 흔적과 함께 바닥 지지석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아마도 문을 걸었던 구멍 같습니다.

성 안에 있는 진휼청

▲ 성 안에 있는 진휼청


  성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곡물가격을 조절하고, 환곡(還穀)등 흉년에 기민구제를 하던 진훌청(賑恤廳)이라고 하는 관청이 맨 먼저 보입니다.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있습니다.

 또한 성 내에 영보정과 망해루를 두어 바다와 주변의 크고 작은 섬들을 살폈고,  또한 성 안에 도로를 만들어 관사와 백성이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이 성은 해변의 구릉을 정점으로 쌓은 성이어서 바다를 관측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곽에서 내려다 본 바다. 전망과 경계에 좋은 위치다.

▲ 성곽에서 내려다 본 바다. 전망과 경계에 좋은 위치다.
 

성곽

▲ 성곽이 길다랗게 쌓여 있다
 

진휼청 왼쪽에서 바라본 바다.

▲ 진휼청 왼쪽에서 바라본 바다.
 

성곽을 걷는 다른 관광객들

▲ 성곽을 걷는 다른 관광객들
 

오천항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오천항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곽을 따라 돌아보면 해안가쪽으로 이어지는데 이렇게 전망이 우선 좋습니다. 바다를 관측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면서 오늘날에는 전망 좋고 경치 좋은 관광지 역할을 해 줍니다. 선조들 덕분에 말입니다.

 오천은 백제때부터 회이포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로 이용됐던 곳이라 합니다. 통일신라 당시에는 당나라와의 교역 창구로서 이름이 높았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오천항 일대를 지키는 수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수영이 설치된 것은 조선조 때입니다.

 

수영성 객사

▲ 수영성 객사
 

객사의 삼문

▲ 객사의 삼문

더 가까이 다가가서 뒤에서 본 수영성 객사

▲ 더 가까이 다가가서 뒤에서 본 수영성 객사
 

객사 앞에 있는 역대 수사와 관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들

▲ 객사 앞에 있는 역대 수사와 관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들


 앞서 본 서문에 해당하는 망화문과 진휼청이 있고 좀더 가면 길 건너편에는 수영성 객사가 남아있습니다. 객사 건물 앞에는 역대 수사와 벼슬을 지낸 관리들의 기리는 비석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오천성은 성곽과 문화유물 뿐만 아니라 인접한 오천항으로도 유명합니다. 보령시의 어항 중 대천항에 이어 두번째로 규모가 큰 곳이고 전복, 바지락, 해삼을 비롯한 조개의 집합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으로 수출을 많이 하는 키조개의 산지로 유명하죠.

 그래서 오천항에는 키조개잡이(일명 머구리) 배들이 많으며 한꺼번에 조개를 풀어놓으면 오천항은 파시가 열립니다. 오천항에 입항하는 키조개 물량이 1년에 70억원어치나 된다고 하니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가을철이 되면 억새가 유명한 오서산 등산을 즐기고 이곳 오천항에 들러 유명한 강개미회를 먹고 가려는 관광버스가 수시로 드나들기도 합니다.

 의미 있는 역사 공부와 함께 먹을 것도 많고 볼것도 많고 친절하며 여유가 넘치는 보령입니다. 넓고 푸른 바다는 큰 가슴을 열어 여러분을 품에 안고 맞이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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