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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자취가 남아 있는 '해암리 게바위'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

2013.06.22(토) 19:01:15 | 메아리 (이메일주소:okaban@naver.com
               	okab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순신 탄신기념 온양문화제 행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지난 4월, 이충무공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게바위’에 관한 내용이 '[대전KBS_1TV] 충청의 얼'에 나오는 것을 보았다.

‘게바위’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에 소재하고 있는 이곳이 충무공의 효심이 깃든 곳이라 하여 찾아보았다. '현대로(624지방도로)' 도로변, 인주면 해암2리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좁은 마을길은 승용차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농촌 마을이다.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현대로/624지방도로)

▲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현대로/624지방도로)


인주면 해암마을을 돌아서면 들녘 논가에 ‘게바위’가 오롯이 서 있었다. 삽교호 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강물과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으로 뱃길이 닿았던 곳이라고 한다.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게바위 전경

▲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게바위 전경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선조 30년(1597) 명·일간의 휴전회담이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해로 공의 나이 53세 때의 일로서, 왜군은 이순신의 제거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시 동인과 서인의 갈등에 오락가락하던 조정중신들을 이용하여 이순신을 모략하게 되었다.

질투심이 많았던 선조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나라를 져버린 죄” 등을 적용하여 삭탈관직 함은 물론 심한 국문과 형옥을 가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정한다.생사의 기로에 선 이순신은 다시 극적으로 풀려났고 백의종군 길에 오르게 된다.옥에서 풀려나 종군 전에 노모를 뵙기 위해 아산 땅에 들렀으나 당시 전남 여수에 계시던 82세의 노모 변(卞)씨는 아들이 감옥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배편으로 고향인 아산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돌아가셨고, 공이 이 곳 ‘게바위’에 달려와 시신을 붙잡고 통곡했다고 전하는 자연석 바위다.

싸늘하게 식은 어머니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는 장군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누란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한 불세출의 한 무인으로서 어버이에 효성을 다한 한 자식으로서 장군과 그 시대는 갔어도 역사는 남아 이 ‘게바위’와 더불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충청의 문화유산 가치를 널리 알리며 충청에 살아가는 충청인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역사캠페인 방송으로서 충무공 이순신의 효성이 깃든 아산 ‘게바위’에 관한 내용이다.
'[대전KBS_1TV] 충청의 얼'(2013년 4월 28일(일) ~ 5월 4일 (토) / 1일 5회) 방송되었다(인터뷰 : 서교일 총장)

[대전KBS_1TV] 충청의 얼' 방송 캡쳐

▲ [대전KBS_1TV] 충청의 얼' 방송 캡쳐

이충무공은 1597년 왜군의 계략으로 갖은 문초와 옥살이를 살았다. 아들을 보기 위해 여수에서 상경하던 어머니는 배에서 숨을 거두었다.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아산 해암리 ‘게바위’에서 불효를 자책하며 오열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순신은 어머니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백의종군의 길에 올라야했고 이 광경을 본 백성들이 이순신과 함께 통곡을 했다고 한다."효도는 백행의 근본이다"라는 말처럼 어머니에 대한 충무공의 이러한 효성은 전장에서 목숨을 다해 싸우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게바위 전경

▲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게바위 전경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게바위

▲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게바위
 

게바위

▲ 게바위 유래비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게바위

▲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해암리 게바위 안내문
 

게바위 ...뒷면에서 본 모습

▲ 게바위 ...뒷면에서 바라본 모습


이순신 장군의 자취가 남아 있는 해암리 ‘게바위’ 주변은 그 옛날에는 이곳 해암리 마을까지 강물과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으로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 긔해 나루터가 있었으며 선장면 흥곶리와 연결되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출처 : 온양 문화원 향토사연구소)

그때는 긔해나루터가 있던 곳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삽교호가 생기면서 나루터가 있던 주위는 곡교천이 흐르고 넓은 들녘으로 변해 있어서 그때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게바위에서 이순신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게바위 앞에는 게바위에 대한 유래비와 또 난중일기에 대한 기록물을 새긴 비가 있다. 이충무공이 임진왜란 중에 직접 기록했다는 난중일기가 6월19일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됐다는 소식도 있어서 무척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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