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윤봉길 의사를 뵙고 뜨거운 그 무엇을 참을 수 없어서...

2013.06.17(월) 00:41:55 | 최순옥 (이메일주소:didrnlwk55@hanmail.net
               	didrnlwk55@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청년제군에게>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무궁화 삼천리 내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 광분하는가.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이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가나.
피 는끓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여명은 밝아지려 하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 끓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면서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아들에게 남긴 유서>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없음을 슬퍼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순국 직전 남기신 유서>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살고 싶은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나만 나혼자만 잘먹고 잘살다 죽을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와 내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선택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이 문장을 읽고 되뇌이면서 가슴이 얼마나 떨리던지요. 당신이 순국하신 나이라야 그때 당시 겨우 25세였습니다.

요즘 아이들 나이 스물다섯이면 군대 막 갔다 와서 철이 들을까 말까 하는 나이인데 당신은 이미 그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구하려고 나섰습니다.

 결국 당신이 나라를 구하신겁니다. 당신의 의거가 힘이 되어 훗날 대한독립이 이뤄진 것이지요. 누군들 그걸 부인하겠습니까.

 저는 어제 일요일, 윤봉길의사 사적지에 참배하러 갔다 왔습니다. 현충일에는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다녀오셨으리라 믿고, 저는 좀 늦게 다녀왔습니다.

윤봉길의사 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
 

윤봉길의사 흉상

▲ 윤봉길의사 흉상
 

윤봉길

▲ 윤봉길의사가 한인애국단 입단때 쓰신 선서문중 일부 내용이 기념관 복도에 크게...
 

윤봉길 의사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

▲ 윤봉길 의사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
 

윤봉길 의사의 부인 배용순 여사 묘소

▲ 윤봉길 의사의 부인 배용순 여사 묘소
 

의사께서 사셨던 생가

▲ 의사께서 사셨던 생가
 

윤봉길 의사 어록탑

▲ 윤봉길 의사 어록탑


사적지에는 당신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가 있고, 당신이 사셨던 생가와 의거 전후에 쓰셨던 유품 등을 전시한 기념관, 부인 배용순 여사의 묘소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각계 많은 분들이 후세에게 남긴 명언들을 모아 둔 매헌 윤봉길의사 어록탑 까지요.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윤의사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아서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등을 시작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는 활발한 활동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 = 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려다가 일경에 의하여 평안도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 선생을 찾아갑니다. 여기서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을 하겠으니 저를 써 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 앞에서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면서 선서를 하는 장면

▲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 앞에서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면서 선서를 하는 장면
 

애국단 입단 선서문

▲ 의사께서 자필로 쓴 애국단 입단 선서문
 

오른손엔 권총, 왼손에 수류탄을 들고 결연한 각오로...

▲ 오른손엔 권총, 왼손에 수류탄을 들고 결연한 각오로...


그렇게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에 몸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일왕 생일인 천장절 기념 행사와 전승 기념 행사때 이 현장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고 거사를 계획합니다.

거사 당일 들고 간 물병 폭탄 모형

▲ 거사 당일 들고 간 수통 폭탄 모형
 

거사 당일 들고 간 도시락 폭탄 모형. 이건 자살용이었다 함.

▲ 거사 당일 들고 간 도시락 폭탄 모형. 이건 자살용이었다 함.
 

폭탄 투척 전 일본군 배치도

▲ 폭탄 투척 전 일본군 고위급 배치도
 

역사적 폭탄 투척 순간

▲ 역사적 폭탄 투척 순간
 

이날의 거사를 보도한 해외 신문매체

▲ 이날의 거사를 보도한 해외 신문매체


드디어 거사 당일, 의사께서는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자살용 폭탄 두 개를 들고 행사장으로 잠입해 조국의 원수들에게 투척을 합니다.

 이 거사로 인해 침략의 원흉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의사께서는 미처 자살폭탄을 터트리기 전 현장에서 체포되고야 맙니다.

 그리고 1932년  12월19일, 일본에서 저들의 총탄에 의해 순국을 하시고야 맙니다.

편지

▲ 의사의 친필 액자
 

윤봉길의사를뵙고뜨거운그무엇을참을수없어서 1

▲ 의사께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


 기념관에는 당신이 거사를 시행하기전 어머니께 쓴 편지와 친필 액자도 보관돼 있습니다. 

 이후 유해는 해방이 된 후 1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수습이 되어 현재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영면해 계십니다.

 언젠가 윤봉길 의사의 순국 장면을 담은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이사의 꿋꿋한 기개와 일보인들의 잔악함이 그대로 드러나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윤봉길의사의 기개를 꺾으려고 일부러 무릎을 꿇린채 총살형을 시도했고 그 사진을 공개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잔악함을 절대 잊을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제 지난 6월6일 현충일과 함께 시작한 호국 보훈의 달도 보름이 지났습니다.

충의사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의연한 영정 모습

▲ 충의사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의연한 영정 모습


의사의 기념관을 뒤로 하고 나오면서 다시금 충의사에 의젓하게 앉아 계신 초상화를 떠올려 봅니다. 가슴 벅찬 감동과 함께 다시금 당신의 고결하고 위대한 의기를 깊이 새기고 배우며 감사한 마음을 한층 더 갖습니다.
 
 

최순옥님의 다른 기사 보기

[최순옥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