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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의 아픔을 함께한 나무

이야기가 있는 충남의 나무 ⑥: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호야나무)

2014.01.01(수) 21:48:28탈론(malgmywoo@naver.com)

흥선대원군. 조선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의 아버지로서 어린 고종이 다 자랄 때까지 섭정을 한 인물이다. 당시 조선은 서양 각국으로부터 통상의 압력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며 개방을 끝내 반대하였다.
 
개화의 내용에는 종교의 자유도 포함되었는데, 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는 종교탄압으로 이어졌다. 1866년 병인년에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였다 해서 이름 붙여진 병인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1866년 2월 프랑스 신부 베르뇌 등 9명의 신부들과 수천명의 교인들이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군인들이 쳐들어온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고 이 여파로 또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됐다. 그 해 4월에 일어난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의 덕산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은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계기가 되었다.
 
내포지방은 초창기부터 천주교가 유포된 지역이었다. 대원군의 강력한 천주교 박해 정책으로 이 때 충청도 각지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두 해미읍성에 갇혔는데, 서문 앞 돌다리에서 자리개질로 처형되기도 하고, 읍성 바깥의 해미천변 큰 구덩이에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천주교 박해의 현장인 해미읍성

▲ 천주교 박해의 현장인 해미읍성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현장을 코앞에서 처음부터 지켜본 나무가 있다. 때로는 그들의 처형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 나무. 바로 병인박해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 172호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이다. 주민들에게는 서산 지역의 사투리인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다.

천주교 학살의 현장을 코앞에서 지켜본 호야나무

▲ 천주교 학살의 현장을 코앞에서 지켜본 호야나무


사실 해미읍성을 다녀온 것은 지난해 12월 초쯤이었는데, 기말고사가 코앞에 있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기사쓰기를 미루다보니 어느덧 한해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새해 첫날 새로운 마음으로 해미읍성 회화나무를 소개한다.

천주교도들이 갖혀 있던 옥사의 모습. 이 옥사의 앞에 호야나무가 있다.

▲ 천주교도들이 갖혀 있던 옥사의 모습. 이 옥사의 앞에 호야나무가 있다.


읍성의 옥사에 갇혀있는 천주교도들은 매일 종교 버리기를 강요받았다. 이를 거부한 이들은 옥사에서 끌려나와 철사에 머리채가 묶여 이 나무 동쪽 가지에 매달렸다. 그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만다. 배교를 거부하던 신자 가운데는 회화나무에서 그대로 교수된 사람도 있었다. 그 이후로 회화나무를 교수목(絞首木)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때로는 나무에 매달아 놓고 활을 쏘아 처형하기도 했단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된다.

배교를 거부한 천주교도들은 이 나무에 머리채가 매달리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 배교를 거부한 천주교도들은 이 나무에 머리채가 매달리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원래 회화나무는 모양이 둥글고 온화하여 중국에서는 이를 학자수(學者樹)로 취급하여 선비가 살던 옛집이나 무덤 주위에 즐겨 심었다. 한자로는 괴화(槐花)나무로 표기하는데 중국발음과 유사한 회화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홰나무를 뜻하는 한자인 ‘槐’(괴)자는 귀신과 나무를 합쳐서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회화나무는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궁궐의 마당이나 출입구 부근에 많이 심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기개 있는 가지 펼침이 학문의 길을 닮은 데다 악귀까지 물리치기 위해 서원이나 향교 등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당에도 회화나무를 심었다.
 
나무의 높이가 약 25m까지 자라며 가지가 넓게 퍼진다. 꽃은 8월에 흰색으로 피는데, 꽃봉오리를 괴화(槐花) 또는 괴미(槐米)라고 하며 열매를 괴실(槐實)이라 한다. 우리나라 산지에서 자라며 정원수나 목재는 가구재로 이용한다. 영문명으로는 차이니즈 스칼라 트리(Chinese scholar tree)라고 하며 활엽수종 중 공해에 가장 강한 수종으로 알려져 가로수·공원수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뭇가지들이 대부분 부러져 여러차례 외과수술을 시행했다.

▲ 나뭇가지들이 대부분 부러져 여러차례 외과수술을 시행했다.


평범하게 자랐다면 참으로 보기 좋게 펼쳤어야 할 이 회화나무의 나뭇가지들은 대부분 부러져버렸다. 동쪽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졌다고 한다. 아마도 못 볼 것들을 보아오며 안으로 고통을 삭였던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여러 차례 외과 수술을 시행하고 현재는 토양을 개량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관아 앞에 풍채좋게 서있는 느티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관아 앞에 풍채좋게 서있는 느티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반면 해미읍성에 관아 앞에는 풍채가 좋은 오래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나무도 감정이 있으리라. 못 볼 것을 보아온 회화나무의 수형이 빈약한 것과는 달리 권력 주변에서 자란 느티나무의 수형이 풍만해 보이는 것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까?

느티나무의 늠름한 모습

▲ 느티나무의 늠름한 모습


과거의 아픈 기억도 사라지고 이제는 평범한 관광지가 되어버린 해미읍성. 300여년 간 온갖 풍상을 견디며 그 자리를 지켜온 회화나무에게는 아직도 상처가 깊다. 신자들을 매달았다는 동쪽의 가지는 훼손되어 옹이만 남았지만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옹이 주변으로 녹슨 철사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차례 외과수술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 여러차례 외과수술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수년전만 해도 옹이 주변에 철사를 묶었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 수년전만 해도 옹이 주변에 철사를 묶었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역사의 슬픔을 간직한 이 나무를 좀 더 따뜻하게 보듬어 주어, 그 아픔을 잊도록 해주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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