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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청도(洪淸道)’와 ‘공홍도(公洪道)’를 아시나요

천년고도 ‘홍성’의 위상

2022.12.27(화) 08:55:12장군바라기(hao0219@hanmail.net)

홍주읍성 동문 조양문 전경.

▲ 홍주성 동문 조양문 전경.


조선은 개국 초기 지방조직의 효율성을 위해 한반도를 팔도(八道)로 나누고 각 도의 대표적 도시 2개의 머리글자로 지명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 충청도는 청주와 충주시에서 각각 을 따오는 식으로 강원도(강릉+원주), 황해도(황주+해주), 전라도(전주+나주), 경상도(경주+상주), 평안도(평양+안주), 함경도(함흥+경성)를 짓고, 예외적으로 경기도만 서울()’ 사방 500리 임금 직할권으로 ()’를 붙였습니다. 이 같은 광역행정 단위는 189613도 개편 이전까지 근 500년간 이어집니다.
 

홍주성의 고지도.

▲ 홍주성 내부 모습을 담은 고지도.


그런데 조선시대 충청도의 지명은 수시로 바뀌었는데 청주를 빼내고 '홍충도(홍주+충주)'나 '충홍도(충주+홍주)'로 부르거나 충주가 빠지면서 '청홍도(청주+홍주)'로 혹은 청주와 충주를 모두 빼내 '공홍도(공주+홍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홍주는 충남도청이 들어선 내포신도시를 품고 있는 홍성군을 말합니다.

 

공홍도 수군절제사로 임명된 교지

▲ 전운상을 '공홍도' 수군절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지.

  

충남 홍성의 옛 지명인 홍주는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고대에는 백제 멸망 이후 부흥군이 홍주성인 주류성(周留城)에서 나당연합군에 마지막까지 저항했으며, 고려 태조 왕건도 이곳에서 후백제 견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홍주성에 충청 5개 진관 가운데 하나가 설치돼 서해안 일대 412현을 관할했습니다.

 

홍주성의 모형도. 앞쪽의 팔작지붕은 조양문.

▲ 홍주성의 모형도. 앞쪽의 팔작지붕은 조양문.

 

홍주성은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세종 때 쌓기 시작해 문종(1451) 때 수축한 것으로 내부 면적이 37,009에 성벽 길이도 1,772m에 달했지만, 지금은 성벽 800m 구간과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등만 남아있습니다.
 

홍주성의 성벽

▲ 홍주성의 성벽 1.


홍주성의 성벽 2.

▲ 홍주성의 성벽 2.


출입문 역할을 하던 북쪽의 망화문(望華門)과 주변 성벽은 일제 강점기 군청과 세무서, 경찰서, 검찰청, 법원 등 공공기관이 오관리라는 읍성 내부로 입주하는 도시화 과정에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2017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이 한창입니다. 성문을 보호할 목적으로 성문 밖에 이중의 성벽인 옹성을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홍주읍성 북문인 망화문(望華門) 전경.

▲ 홍주성 북문인 망화문(望華門) 전경.


홍주읍성 북문인  망화문(望華門)

▲ 홍주성 북문인 망화문(望華門)의 옹성.


현재의 홍성군청 입구에 세워진 홍주아문은 홍주읍성 안에 홍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안회당의 바깥에 세운 외삼문으로 1870년 홍주읍성을 고칠 때 함께 세웠다고 합니다. 외삼문을 넘어서면 고려 공민왕 때 심은 것으로 알려진 700년에 가까운 수령을 갖은 느티나무(충남기념물 제171)가 있습니다. 이 느티나무는 홍주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밤새 소리를 내어 화를 막아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홍주아문. 홍주목사 집무실인 안회당의 외삼문.

▲ 홍주아문. 홍주목사 집무실인 안회당의 외삼문.


홍주아문의 현판.

▲ 홍주아문의 현판.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은 사라졌다.


수령 700년에 가까운 홍주읍성 느티나무. 고려 공민왕때 심었다.

▲ 수령 700년에 가까운 홍주읍성 느티나무. 고려 공민왕때 심었다.


홍성군청을 끼고 뒤로 돌면 정3품 지방관인 목사가 근무하던 관청인 안회당이 나옵니다. 22칸의 목조건물로 1678년 처음 세워지고 1870년 중수를 했습니다. 안회당 역시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썼는데 광복 이후 분실되어 새로 제작되었습니다.

 

홍주목사의 집무처인 홍주읍성 안회당.

▲ 홍주목사의 집무처인 홍주성 안회당.


홍주목사 집무처인 안회당.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으나 소실됐다.

▲ 홍주목사 집무처인 안회당.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썼으나 분실됐다.


홍주성에는 병오항일의병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1906년 의병이 일어나 관군과 일본군이 지키던 홍주성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죽은 일본군을 애도하기 위해 매국노 이완용 등이 애도지비를 세운 것을 광복 후 철거하고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워 주변을 홍주 의병공원으로 지정돼 항일의병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홍주읍성 병오항일의병대기념비.

▲ 홍주성 병오항일의병대기념비.


홍성읍성 긴며관

▲ 홍주성 역사관. 홍주목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조양문은 1870년 홍주성을 고칠 때 만든 동문으로 1975년 완전 해체복원 했습니다. 아래에는 반원형의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누각을 세웠습니다. 원래는 망일루라고 불렸지만, 흥선대원군이 조양문이란 현판을 써준 이후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처럼 조양문과 서문인 경의문(景義門), 북문인 만환루 현판도 함께 써주었지만, 동학농민전쟁과 홍주의병 6·25전쟁을 거치면서 안타깝게 소실됐습니다.

 

홍주읍성 조양문 전경.

▲ 홍주성 조양문 전경.


홍주읍성 조양문.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 홍주성 조양문. 오른쪽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홍주읍성 조양문. 오른쪽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 홍주성 조양문. 오른쪽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홍주성은 3개의 문이 있는 특이한 읍성으로 알려졌지만, 1980년 고지도를 통해 남문의 존재가 확인됩니다. 최근 발굴을 통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를 확인해 복원하고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으로 문의 이름을 정했다고 합니다.
 

홍주산성 남문 홍화문 전경.

▲ 홍주성 남문 홍화문 전경.


홍주읍성 남문 홍화문 측면 모습.

▲ 홍주성 남문 홍화문 측면 모습.


홍주성이 있는 홍성은 '홍주지명찾기' 운동을 계속해 벌이고 있는데요, 충남도청 이전 등 내포신도시를 통해 옛 홍주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충청의 대표 도시로 거듭나길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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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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