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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내용을 읽어드릴까요?

천년의 시간이 살아 숨 쉬는 1100년기념관 역사문화관

  • 위치
    충남 예산군 예산읍 석양리 298
  • 등록일자
    2026.09.04(Fri) 20:50:48
  • 담당자
    장병인작가 (kis9682@naver.com)
  • 예산군은 2019년,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예산(禮山)'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지 110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조성된 예산 1100년 기념관 역사문화관은 백제 부흥운동의 격전지에서 근현대 산업화의 현장까지, 예산이 걸어온 천년의 발자취를 한자리에 담아낸 공간이다. 도민기자의 눈으로 직접 둘러본 전시실 곳곳을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천년의 관문, 예산의 랜드마크로 서다


    천년의 관문, 예산의 랜드마크로 서다

    예산읍 산 자락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예산 1100년 기념관 외관은 절제된 현대 건축미가 돋보인다. 통유리로 마감된 외벽에 새겨진 '예산 1100년 기념관' 글자가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또렷하게 시선을 붙잡는다. 이 건물의 3층에 자리한 역사문화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예산이라는 지명이 탄생한 91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압축해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다. 건물 좌측의 유리 브릿지와 전망 구조물은 인근 산세와 어우러져 지역의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로도 손색이 없다. 취재를 위해 처음 마주한 이 외관에서부터 예산이라는 고을이 켜켜이 쌓아온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역사문화관으로 이어지는 발걸음


     역사문화관으로 이어지는 발걸음

    검은 화강석 외벽과 금빛 글자가 묵직한 조화를 이루는 입구부는 역사문화관의 품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역사문화관 3층'과 '예산 1100년' 로고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 방문객의 동선을 명확히 안내한다. 이 통로를 지나면 곧바로 예산의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아우르는 상설전시실로 진입하게 된다. 단순한 안내 사인이 아니라, 관람객이 시간여행을 시작하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하게 만드는 일종의 의례적 공간처럼 느껴졌다. 화강석 특유의 무게감 있는 질감은 예산이라는 고을이 지녀온 유구한 역사성과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어, 건축적 디테일 하나에도 기획자의 세심한 고민이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명의 기원과 919년의 약속


    지명의 기원, 919년의 약속

    전시관 야외 데크에 설치된 이 조형물은 나무 목봉을 촘촘히 박아 '예산'이라는 글자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단 안내문에는 "禮山 예산, 919년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지명을 받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실제로 예산이라는 지명은 고려 개국 이듬해인 태조 2년(919년), 기존의 '고산현'에서 개칭되며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예(禮)와 산(山)을 합친 이 이름은 예를 숭상하는 산고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 이후 조선시대 내포 유학의 중심지로 성장한 예산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지역명의 기원을 조형예술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딱딱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시각적으로 친근하게 풀어낸 전시 기획의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백제에서 근현대까지 한눈에


    예산의 발자취, 백제에서 근현대까지 한눈에

    곡선형 벽면을 따라 펼쳐진 이 연표는 전시관의 핵심 도입부라 할 만하다. 660~663년 백제 멸망 후 유민들이 임존성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한 사실을 시작으로 919년 예산 지명 탄생, 925년 견훤과 왕건의 임존성 전투, 934년 태조 왕건의 예산진 행차, 1497년 의좋은 형제 우애비 건립, 1786년 추사 김정희 탄생, 1801년 신유박해와 이존창의 순교, 1844년 세한도 완성, 1868년 남연군묘 도굴 사건, 1894년 동학혁명 관작리 전투, 1914년 예산군 합군에 이르기까지 예산 1100년의 굵직한 사건들이 시간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백제·고려·조선·근현대를 관통하는 이 연표 하나만으로도 예산이 단순한 농촌 지역이 아니라 격동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고장임을 실감하게 된다.


    바다와 강이 빚어낸 비옥한 땅


    바다와 강이 빚어낸 비옥한 땅

    '바다와 강이 만나는 비옥한 곡창지대 예산'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입체 지형 모형에 빛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예산의 지리적 변천사를 설명한다. 화면에는 1917년 덕산면을 예산면으로, 광천면과 신읍리를 용궁면으로 개편했다는 행정구역 개편 기록이 표시되어 있다. 삽교천과 무한천이 흐르고 서해와 인접한 예산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이름 높았으며, 이러한 지리적 이점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농업 중심 산업구조의 토대가 되었다.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빛과 음영으로 지형의 굴곡을 입체적으로 살려낸 연출 덕분에 관람객은 예산의 산과 들, 하천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네 고을의 옛 지도


    예산군·덕산현·대흥현·예산현, 네 고을의 옛 지도

    천장에서 늘어뜨린 네 폭의 대형 족자에는 각각 禮山郡(예산군), 德山縣(덕산현), 大興縣(대흥현), 禮山縣(예산현)이라 쓰인 옛 고지도가 재현되어 있다. 오늘날의 예산군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예산현, 덕산현, 대흥현 세 고을로 나뉘어 있었으며, 근대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며 하나의 예산군으로 통합되었다. 바닥에 투사된 각 고을의 경계 실루엣은 관람객이 직접 발을 디디며 옛 고을의 영역을 체감하도록 돕는다. 산세와 하천을 붓으로 세밀하게 그려낸 옛 지도의 필치에서는 조선시대 지리지 제작의 정교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세 고을이 하나로 통합되어 온 예산의 행정사를 시각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전시라 할 수 있다.


    격랑의 근대사


    남연군묘 도굴 사건, 격랑의 근대사

    가야산 자락에 자리한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시된 목선은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약 100여 명의 중국 청년을 러시아 병사로 위장시켜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던 사건을 재현한 조형물로 안내문에는 '전시용'임을 명시해 관람객의 안전까지 세심하게 배려했다. 오페르트 일행은 묘가 석회석으로 단단히 다져져 있어 도굴에 실패했습니다.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벽면 패널에는 가야사 터의 풍수적 의미와 남연군묘 이장 배경까지 함께 설명되어 있어 조선 후기 왕실 문화와 근대 열강의 충돌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전시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백제 불교미술의 걸작,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전시실 중앙에 우뚝 선 대형 패널에는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의 실물 크기 이미지가 재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백제시대 조성된 사면불상으로 하나의 바위 사면에 불상을 새긴 국내 최고(最古)급 사례로 평가받는 백제 불교미술의 걸작이다. 좌측 화면에서는 태조 왕건이 예산진에 행차했던 934년의 장면이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되고 있으며, 우측에는 백제 유민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항전했던 임존성(任存城)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백제 멸망 이후에도 예산 땅에서 신앙과 저항의 역사가 동시에 피어났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시관 전체에서도 가장 밀도 높은 역사적 서사를 담고 있는 구역이라 할 수 있다.


    산이 낳은 대학자 추사 김정희


    예산이 낳은 대학자, 추사 김정희

    전시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구간 중 하나로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서예가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을 조명한다.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의 이미지와 함께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화제(畵題)가 소개되어 있다. 개성 있는 서체로 이름난 추사체의 특징과 이한철이 그린 1857년작 추사 초상, 예산 용궁리 백송, 추사고택의 모습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예산 신암면에서 태어난 추사는 금석학·경학·시서화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학자로, 그의 학문적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예산을 대표하는 문화적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학자 한 사람의 생애가 한 고을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였다.


    태조 왕건의 행차를 다시 걷다


    태조 왕건의 행차, 다시 걷다

    어두운 몰입형 전시실에서는 934년 고려 태조 왕건이 예산진(오늘날의 예산산성 일대)을 순행했던 역사적 장면이 대형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된다. 화면 속에는 깃발을 든 병사들과 가마 행렬이 좌우로 길게 이어지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라"는 태조의 훈유(訓諭) 내용이 자막으로 흐른다. 왕건은 후백제와의 격전 끝에 예산진에서 대민 조서를 반포했다. 통일 전쟁 막바지 민심 수습을 위한 상징적 조치로 해석된다. 벽면 전체를 감싸는 파노라마 영상 연출은 관람객이 마치 그 시대의 행렬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하며, 텍스트로만 접하던 역사를 생생한 현장감으로 되살려낸 전시 기법이 돋보였다.


    의좋은 형제에서 체험으로 되살아나다


    의좋은 형제, 체험으로 되살아나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문구로 잘 알려진 '의좋은 형제' 설화는 예산 대흥면을 배경으로 전해 내려오는 우애의 이야기다. 형제가 서로 몰래 상대방의 볏단을 자기 낟가리에 옮겨 놓았다는 이 미담은 1497년 세종으로부터 정려를 받을 만큼 그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오늘날까지 형제간 우애의 표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전시관은 이 설화를 단순 소개에 그치지 않고, 형님네와 아우네로 나뉜 두 개의 스크린에서 60초 동안 볏가마니를 옮기는 인터랙티브 게임으로 구현했다. 관람객이 직접 화면을 터치하며 형제의 마음을 체험하도록 설계했다. 역사문화관이 단순 관람을 넘어 교육적 재미까지 고민했음을 잘 보여준다.


    내포 정신의 뿌리


    효와 유학의 고장, 내포 정신의 뿌리

    '효의 본고장 예산'과 '내포 유학의 중심지, 예산의 유교정신'을 다룬 이 두 패널은 예산의 정신문화적 토대를 조명한다. 예산은 예로부터 효자와 열녀가 많기로 알려져 나라의 명으로 정려가 여럿 세워졌으며, 봉산면 조극선 효자 정려는 1664년 현종 5년에 하사된 대표적 사례로 소개된다. 우측 패널에서는 예산이 도학풍, 성리학풍, 무실학풍, 실학풍이 두루 발달한 내포 유학의 중심지였음을 설명하다. 의리적 가치를 중시한 도학풍부터 실사구시를 추구한 실학풍까지 다양한 학풍이 공존했던 지적 토양을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 같은 대학자가 예산에서 배출된 배경에는 이러한 유구한 유교적 전통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항일 구국의 함성


    예산의 동학혁명, 항일 구국의 함성

    1894년 동학혁명은 근대적 개혁과 항일 구국운동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사건으로 내포 지역에서는 삽교 하포리에서 기포(起包)가 시작되어 삽교읍 성리에 예포대도소가 설치되었다. 특히 10월 26일 벌어진 신례원 관작리 전투와 예산산성 전투에서 내포 동학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기념해 관작리에 공원과 기념탑이 조성되었다. 전시 패널에는 내포 동학의 지도자였던 춘암 박인호(1855~1940)의 활동 연보가 상세히 정리되어 있고, "보국안민 척양척왜 깃발 아래"로 시작하는 동학농민군의 노랫말도 함께 소개된다. 지도 위에 표시된 여러 전투 거점들은 내포 지역 전체가 항일 투쟁의 뜨거운 현장이었음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태극기에 새겨진 애국의 마음


    태극기에 새겨진 애국의 마음

    '역사 속 태극기 변천사'를 다룬 이 전시는 1890년경 제작된 데니 태극기부터 1907년 불원복 태극기, 1919년 남상락 자수 태극기, 1941년 김구 서명문 태극기, 1945년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1950년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그리고 현재의 태극기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변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특히 1919년 남상락 자수 태극기는 독립운동가 남상락이 충청남도 당진에서 만세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손바느질로 제작한 것으로 전해져 예산·내포 지역과의 연관성이 깊다. 벽면에 크게 인쇄된 인물 사진과 나란히 배치된 이 연표였다. 태극기 한 장 한 장에 담긴 독립운동가들의 결의와 애국의 역사를 응축해서 전달하고 있었다.


    예산 산업사의 한 페이지


    섬유공업의 흥망, 예산 산업사의 한 페이지

    '번창했던 섬유공업의 상징, 충남제사'와 '예산 산업의 성장 동력, 충남방적' 두 패널은 근현대 예산의 산업화 역사를 조명한다. 1926년 예산읍 주교리에 설립된 충남제사는 60여 년간 예산의 대표적 제조업체로 자리했으나 1982년 문을 닫았다. 1954년 예산 출신 이중성이 인수해 1975년 예산읍에 공장을 준공한 충남방적은 1980년대 중반까지 연 매출 3천억 원대로 성장하며 예산 섬유공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 공장 전경은 정미업과 양조업 중심이던 예산 산업이 섬유공업, 연탄제조업, 기계공업으로 확장되어간 근현대사의 궤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농업 고장으로만 알려진 예산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흥미진진 찾기 대결


    예산의 명소 10선, 흥미진진 찾기 대결

    관람 동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안내데스크 구역에서는 '흥미진진! 명소 찾기 대결'이라는 이름으로 예산의 10대 역사문화 명소를 소개한다. 근대 건축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 꼽히는 예산성당, 4대에 걸쳐 애국지사를 배출한 수당기념관, 추사기념관과 추사고택, 1913년 설립된 호서은행, 내포보부상촌, 윤봉길 의사의 영정이 모셔진 충의사, 예산시장, 대흥슬로시티, 백제 불교미술의 걸작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예당관광지가 사진과 함께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다. 관람객이 직접 스탬프투어와 인터랙티브 지도를 통해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한 이 코너는, 전시관 관람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답사로 이어지도록 유도하는 알찬 마무리였다.



    예산 1100년기념관

    ○ 위치: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벚꽃로 214-14

    ○ 전화번호: 041-339-8090

    ○ 특징: 복합문화복지센터 부지 내에 군립도서관과 청소년수련관, 노인종합복지관 등 서비스를 누릴 수 있음

     * 방문일자: 2026년 9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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