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남도 금산군의 북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진산면은 이름 그대로 '보배로운 산'들이 겹겹이 호위하고 있는 아늑한 고장입니다. 대둔산의 수려한 산세가 이웃하고, 사방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이 땅을 적시는 이곳은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속세의 소음이 아득해지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속에는 한국 역사, 특히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뜨겁고도 아픈 기억이 서려 있습니다.
그 유서 깊은 땅이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게 된 것은 1791년(정조 15년)의 일입니다. 이곳에 살던 선비 윤지충(바오로)과 그의 이종사촌 권상연(야고보)이 유교식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지방)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 사건(신해박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전주 전동성당 터에서 참수를 당하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데요. 신분 계급과 차별이 당연시되던 유교 사회에서 인간 존엄과 평등, 그리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고귀한 흔적이 바로 이 진산의 푸른 산자락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진산성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화려하고 웅장한 현대식 성당이 아닙니다. 진산성지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나지막하고 고풍스러운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오는데요. 바로 2017년 국가등록문화유산(구 등록문화재) 제682호로 지정된 '천주교 진산성지성당'의 구 성당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지어진 이 성당은 한국 전통 건축 양식인 한옥과 서양식 성당 건축이 묘하게 어우러진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유학자들이 모여 글을 읽던 서원이나 전통 가옥 같은데요. 내부로 들어서면 길게 뻗은 회랑과 제대가 엄연한 기도의 공간임을 보여줍니다.

▲ 진산성지 (구)성당의 순교자 조형물

성당 옆에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그리고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을 기리는 이 세 개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모진 박해와 형벌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들의 굳건한 신앙을 상징하듯 단단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 진산역사문화관 입구

한옥 성당 바로 옆에는 정갈하게 지어진 '진산역사문화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진산의 뿌리 깊은 역사와 한국 천주교의 시초가 된 극적인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문화 공간인데요. 전시실은 크게 '진산 문화실'과 '진산 사건실'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뉩니다.

▲ 진산역사문화관 진산 문화실


우측의 진산 문화실은 선사시대부터 조선 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진산면이 걸어온 행정적·지리적 변화와 문화를 소개합니다. 백제 시대의 진동현에서 태조의 태실 봉안으로 진산군이 되었던 화려한 과거, 그리고 1914년 금산군과 병합되기까지의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지역의 정체성을 깊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 진산역사문화관 진산 사건실

좌측의 진산 사건실은 이 여행의 핵심인 '진산 사건'의 전말을 다룹니다. 천주교 전래 과정과 함께 윤지충과 권상연이 왜 목숨을 걸고 신주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는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 다양한 사료와 시각 자료, 조형물로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두 사람이 체포된 후 국문을 받았던 심문 기록(공초)을 재현한 공간입니다. "살과 뼈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나, 영혼과 목숨은 천주께서 주신 것"이라며 서슬 퍼런 고문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두 사람의 당당한 목소리가 텍스트와 그래픽으로 시각화되어 있어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신분 계급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진리를 증언한 이 기록은 진산 사건이 단순한 종교 탄압을 넘어선 인권 선언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역사문화관에서 나와 발길은 자연스럽게 '진산성지순례길'로 이어집니다. 이 길은 순교자들이 걸었을 고난의 길이자, 오늘날을 살아가는 여행자들에게는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치유의 숲길인데요. 순례길은 대둔산 자락의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예수의 수난 과정을 묵상하며 걷는 '십자가의 길' 조형물들이 숲속 군데군데 서 있습니다. 울창한 나무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피톤치드 향과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흙길의 감촉이 참 좋습니다.

진산성지에서 짙은 역사와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면, 차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금산 지구별 그림책 마을'로 이동해 마음의 온기를 더해보는 동선을 추천합니다. 대둔산 자락 아래 펼쳐진 이곳은 한국 최초의 '그림책 마을'이자, 전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예술 공간입니다.

▲ 금산지구별 그림책마을 본관

이곳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도서관이자 정원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 안에는 아이부터 성인까지 자유롭게 그림책을 탐독할 수 있는 '넉점반 도서관'과 서점, 그리고 그림책 원화가 전시된 작은 갤러리가 있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면 영유아들이 안전하게 뒹굴며 책을 볼 수 있는 놀이터 같은 '행복한 도서관'이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에게 안성맞춤입니다.
금산 진산면으로 떠나는 여행은 230여 년 전 인간 존엄을 외쳤던 순교자들의 숭고한 발자취에서 시작해, 푸른 숲길의 침묵을 거쳐, 달콤한 그림책 한 권이 주는 위로로 완성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영혼의 안식처가 필요할 때 역사와 자연, 그리고 문학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금산의 품으로 훌쩍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진산성지 국가등록문화유산성당
○ 위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
○ 관람안내: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30분(매주 월요일 휴관)
금산지구별그림책마을
○ 위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장대울길 52
○ 이용안내: 오전 11시~오후 7시(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성인 5,000원/ 아동, 청소년 3,000원
* 취재일: 2026.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