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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역사

내용을 읽어드릴까요?

[충남의 전통사찰(번외)] 구산선문의 중심 보령 성주사지(聖住寺址)

영광이 드리운 그림자 길게 누워 바람에 지워지다

  • 위치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 등록일자
    2026.01.29(Thu) 15:23:17
  • 담당자
    휘리릭 (mch7775@hanmail.net)
  • 천년역사 보령 성주사지 복원조감도. (정면)

    ▲ 천년역사 보령 성주사지 복원조감도. (정면)


    성주산 남쪽 골짜기 갑자기 펼쳐진 평지

    천여 칸의 도량이었던 흔적은 주춧돌 몇 개에 기대어 있습니다.

    낭혜화상탑비에서 최치원의 오천여 자 비문을 더듬이지만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남포석뿐, 바람에 섞인 메아리처럼

    돌위의 불법은 임진왜란의 불길에 타버린 지 오래입니다.

    석등은 불꽃을 잃은 채 어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사면 텅 빈 눈으로 오층석탑과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고

    세쌍둥이처럼 나란히 세워진 동, 중앙, 서 삼층석탑은

    탑신 사이 스며든 세월의 무게를 나눠지 듯 어깨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석불입상은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강당지 너머 홀로 앉아

    성주가 떠난 빈자리 보이지 않는 역사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천년역사관 문턱을 넘으면 유물들이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중문처, 석등, 5층석탑, 금당지, 3층석탑, 삼천불전지, 회랑터의 윤곽이

    풀숲에 새겨진 채 지금도 ‘여기 있었노라’고 외칩니다.

    찬 겨울 성주산 골짜기 안쪽으로 바람이 불어오면

    성주가 살았던 터가 아니라, 이제 성주가 떠난 빈자리가 가슴을 채웁니다.

    성주산 푸른 산허리가 사지를 감싸 안지만

    그 품 안에서 잃어버린 것은 오늘날 나의 아쉬움 만큼이나

    영광이 드리운 그림자 길게 누워 겨울 바람만 남깁니다.



    성주사(聖住寺)는 충남 보령시 성주산(677m) 남쪽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 말기 9산선문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본산이 있던 자리입니다. 창건연대는 616년 백제 법왕이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원혼이 불계에 오르기를 바라며 세운 원찰 오합사(烏合寺)가 세워지고 이후 통일신라 말기 낭혜화상 무염(無染. 800~888)이 절을 크게 중창해 성주사로 바뀌었는데 절터에서는 백제에 이어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천년역사 보령 성주사지 복원조감도. (후면)

    ▲ 천년역사 보령 성주사지 복원조감도. (후면)


    무염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태종무열왕 8대손인데 12살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출가해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821년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지상사 화엄강석에 참여했다가 선종(禪宗)의 영향으로 불광사 여만에게 선법을 배우고 마곡사 보철에 법맥을 이어받아 845년 귀국까지 25년간 중국에서 보살행을 실천합니다. 그리고 847년 성주사에 주석하면서 통일신라 후기 선풍(禪風)의 주역이 됩니다.


    신라 불교 선종의 구산산문 .

    ▲ 신라 불교 선종의 구산산문 .


    하지만, 무염이 입적한 888년 이후 성주사의 내력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는데 그의 제자인 심광, 자인, 여엄, 대통 등이 선풍을 이어받아 13세기 고려 시대에도 성주산문 본산으로 높은 사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 16세기 지역 주요 사찰로 명성을 떨치다가 17세기 숭유억불과 연이은 전란 등으로 폐사됐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천년역사 보령 성주사지 역사(성주사지 천년역사관).

    ▲ 천년역사 보령 성주사지 역사(성주사지 천년역사관).


    가람배치는 산속에 있는 당시의 절과는 달리 평지형식을 택했습니다. 절터의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 금당건물이 있고 그 뒤로 특이하게 동서로 나란히 삼층석탑 3기에 이어 강당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은 사지 북서쪽에 위치합니다.


    천년고찰 보령 성주사지 가람 배치 전경.

    ▲ 정면에서 바라본 천년고찰 보령 성주사지 전경.


    사지의 배경인 성주산은 보령시 동쪽과 남쪽을 가르는 경계입니다. 성주계곡이 주봉의 남서쪽으로 형성되어 산줄기 사이로 하천을 이르면서 성주사지 전면을 흐릅니다. 절터의 서쪽은 성주산에서 뻗어내린 옥마산 줄기가 감싸고, 동쪽은 부여 무량사가 자리 잡은 만수산이 있습니다. 서해까지는 직선거리로 9㎞로 가까운 곳입니다.


    서츠겡서 바라본 천년고찰 보령 성주사지 전경.

    ▲ 서쪽에서 바라본 천년고찰 보령 성주사지 전경.


    가람은 발굴조사로 모두 5차에 걸친 변천 과정이 확인되었는데 1차는 오합사 창건기로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로 비정합니다. 이때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동일 축선 상에 동, 서, 남쪽에는 회랑을 두른 형태로 추정됩니다. 오층석탑 아래쪽에서 판축 흔적이 확인되어 목탑의 축기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후면에서 바라본 천년고찰 성주사지 전경.

    ▲ 후면에서 바라본 천년고찰 성주사지 전경.

     

    2차 가람은 7세기 말 오합사 중건기로 동서 부속 건물지 구조변화 이외에는 창건기 가람배치를 답습했으며, 3차는 성주사 창건기인 9세기 중엽으로 오합사 건물이 화재로 폐기된 이후 그 자리에 새롭게 금당과 강당지, 회랑지를 세웠는데 전체적으로 규모가 상당히 커집니다. 4차 가람은 삼천불전 창건기로 동회랑지가 폐기되고 대신 그 자리에 삼천불전이 조성됐으며, 5차가람은 불전의 남쪽으로 새로운 건물지들이 조성되는데, 건물 내부에 배수시설 등으로 욕실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문화유적은 일제강점기 작성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사지에 많은 와편과 초석 수십 개가 남아 있고 오층석탑 1기와 삼층석탑 3기, 비와 화강암 입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까지 남아 있었던 철불은 사라지고 석불입상만 남아 있었습니다.

     

    성주사지 발굴에서 출토된 각종 석재부속물.

    ▲ 성주사지 발굴에서 출토된 각종 석재부속물.


    성주사지 자체는 1984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여러 차례 지표조사와 유적발굴조사가 이어졌는데 가람배치와 변천내용을 체계적으로 밝힐 수 있었습니다. 트렌치조사에서는 백제 시대 유구를 토층에서 확인해 성주사 전신인 오합사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발굴조사서에 따르면 성주사지는 모두 다섯 차례 건물 기단이나 평면에 변화를 확인합니다. 금당지와 중문지는 3차례 중건되었고 삼천불전은 동회랑이 폐기된 이후 조성되어 창건기와 중건기 2차례 변화를 파악했습니다. 강당지는 그 기본적인 성격을 계속 유지하면서 평면형의 변화가 가장 잘 나타나 동·서 양편의 건물지나 회랑지가 함께 변화됨이 확인되면서 성주사지 가람배치 변천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주사지 발굴에서 출토된 각종 와편과 도기파편류

    ▲ 성주사지 발굴에서 출토된 각종 와편과 도기파편류


    성주사는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성주사를 창건했고 선종 구산산문의 중심으로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聖住寺址 大朗慧和尙塔碑)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존 통일신라 탑비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 솜씨 등 최고작으로 평가되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각 전경.

    ▲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각 전경.

     

    비문에 따르면 무염은 무열왕 8세손으로 801년(애장왕 2년)에 태어나 열세 살에 출가해 821년(헌덕왕 13년) 당나라로 유학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845년(문성왕 7년) 귀국하여 당시 웅천(현재 보령)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고 선(禪)을 널리 알리고 번성시켜 왕으로부터 ‘성주사’라는 사찰명을 하사받고 888년(진성여왕 2년) 89세로 입적합니다.


    정면(왼쪽)과 측면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정면(왼쪽)과 후측면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탑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었습니다. 하지만, 받침돌 일부가 심하게 훼손되어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고 전각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발굴 당시 거북의 얼굴 일부분은 깨졌지만, 머리의 둥근 뿔과 뒤로 째진 눈에 눈썹이 휘말리고, 입은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가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등에는 이중 육각 무늬가 선명하고 중앙에 굵직한 구름무늬 위로 비 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고 각 면을 장식하였습니다.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하부.

    ▲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하부.


    비 몸 앞면에는 1520자의 비문이 새겨지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는데 위에 올려진 머릿돌 밑면에는 연꽃이, 그 위로는 용과 구름이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해 용틀임의 힘차고 웅장한 기상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앞면 받침돌 거북 머리와 같은 방향의 용머리도 툭 불거져 나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측부.

    ▲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측부.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머릿돌.

    ▲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머릿돌.


    비문의 글은 당대 최고 문장가 최치원이 지었고, 글씨는 그의 사촌 최인곤이 썼는데 비를 세운 시기가 나타나지 않지만, 890년(진성여왕 4년)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에 따라, 같은 시기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비문 내용 가운데 무염의 가계에서 진골이었던 가문이 아버지대에 이르러 6두품으로 낮아지는 내용이 등장해 신라 골품제도 연구자료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후부.

    ▲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후부.


    성주사지를 둘러보기 위해 중문지로 들어서면 좌우에 동서회랑지 윤곽이 들어오고 정면으로는 성주사지석등(聖住寺址石燈. 충남유형문화유산)과 마주합니다. 높이 220cm의 화강암으로 통일신라 말기 성주사 창건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양식입니다. 지붕돌이 두꺼운 편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이 가늘게 만들어 진 것이 특징입니다. 4면에 화창이 있고 상·하대석의 연화문이 이중으로 중첩되며 간주석과 화사석에 민흘림이 관찰되는 점 등의 양식적 특징이 있습니다. 팔각형 지붕돌의 상륜부가 파손된 것을 수습한 것입니다.


    덩면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석등.

    ▲ 정면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석등.


    측면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석등.

    ▲ 측면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석등.


    금당터로 향하는 길에는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이 세워져 있습니다. 5층석탑은 뒤편의 3층 석탑 3기와 층수만 다를 뿐 조성 솜씨가 비슷합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 탑신(塔身)을 올리고 기단의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습니다. 기단 위에는 탑신의 고임을 위해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는데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각 면의 귀퉁이에도 기둥 모양이 새겨졌는데 지붕돌은 밑면에 4단 받침을 두었고 추녀 밑으로 수평을 이루다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습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

    ▲ 정면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시대 탑의 전형이지만, 1층 몸돌 아래 괴인 돌을 따로 끼워 둔 것은 고려 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층마다 구성의 짜임새가 우아한 모습을 연출합니다.


    사면 모서리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

    ▲ 사면 모서리에서 바라본 천년사지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

     

    이어 성주사지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 충남유형문화유산)은 통일신라 조성된 것으로 성주사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입니다. 석 계단 양쪽에는 돌사자상 조각되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조각 수법이 아주 뛰어났으나 안타깝게 1986년 도난당해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년 사역 정비 시 복원해 재설치하였습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성주사지 금당터 석계단.

    ▲ 정면에서 바라본 성주사지 금당터 석계단.(복원품)


    측면에서 바라본 성주사지 금당터 석계단.(복원품)

    ▲ 측면에서 바라본 성주사지 금당터 석계단.(복원품)

     

    금당터를 넘어서면 삼층석탑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3개의 탑 가운데 자리 잡은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中央三層石塔)는 상·하 2단의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리고 있습니다. 기단에는 각 층의 4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고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습니다. 탑신부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고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습니다.


    중앙과 동, 서로 나란히 배치된 성주사지 삼층석탑.

    ▲ 중앙과 동, 서로 나란히 배치된 성주사지 삼층석탑.


    천년고찰 성주사지 중앙(中央)삼층석탑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중앙(中央)삼층석탑 전경.


    남쪽중앙과 동, 서로 나란히 배치된 성주사지 삼층석탑.각으로 채웠는데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고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가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1층 탑몸돌을 괴는 형식과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 통일신라 후기 탑의 모습으로 경내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지만, 가장 많은 손상을 입었습니다.


    천년고찰 성주사지 중앙(中央)삼층석탑 남측 문비 조각.

    ▲ 천년고찰 성주사지 중앙(中央)삼층석탑 남측 문비 조각.


    천년고찰 성주사지 중앙(中央)삼층석탑 사면 모서리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중앙(中央)삼층석탑 사면 모서리 전경.


    동삼층석탑(東三層石塔)은 조성 양식에서 다른 2기의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말기 같은 석공에 의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높이는 4.1m로 2층 기단 위에 3개의 층으로 구성되었고 기단 상부에 괴임대 형식의 별석받침이 있습니다. 1층 탑신 전‧후면에는 문고리와 자물쇠가 표현된 문비(문짝)가 조각되는 등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균형 잡힌 비례와 체감,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천년고찰 성주사지 동(東)삼층석탑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동(東)삼층석탑 전경.


    천년고찰 성주사지 동(東)삼층석탑 사면 모서리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동(東)삼층석탑 남측 문비 조각.


    천년고찰 성주사지 동(東)삼층석탑 사면 모서리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동(東)삼층석탑 사면 모서리 전경.


    가장 왼편(서쪽)으로는 보령 성주사지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이 세워져 있습니다. 탑을 받치는 기단은 2단으로 기단 맨 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 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줍니다. 3층을 이루는 탑신의 1층 몸돌 남쪽 면에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이 조각되었습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 받침이 있고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치켜 올라갔습니다. 꼭대기 탑의 머리 장식은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습니다. 1971년 해체·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이 발견되었지만, 안에서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두 삼층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으로, 기단이나 지붕돌 양식에서 통일신라 후기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천년고찰 성주사지 (西)삼층석탑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西)삼층석탑 전경.


    천년고찰 성주사지 (西)삼층석탑 남측 문비.

    ▲ 천년고찰 성주사지 (西)삼층석탑 남측 문비.


    천년고찰 성주사지 (西)삼층석탑 4면 모서리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西)삼층석탑 4면 모서리 전경.

     

    이어 강당지 향 오른편으로 보령성주사지석불입상(保寧聖住寺址石佛立像)은 타원형 얼굴 모양의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마멸이 워낙 심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머리는 소발이고 정수리 부분의 육계 표현은 뚜렷하지 않습니다. 왼쪽 귀는 사라지고 코는 시멘트를 사용해 수리했던 것을 복구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일그러진 인상임에도 비교적 우아하고 세련된 자태를 보여줍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 배에 대고 있는 형태이며, 입은 법의는 양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식인데 어깨에서 배까지 U자형 옷 무늬를 표현하고, 양팔 등에는 계단식 옷 무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천년고찰 성주사지 석불입상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석불입상 전경.


    천년고찰 성주사지 석불입상 상반신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석불입상 상반신 전경.


    성주산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성주사지 천년역사관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면 마음속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선종의 전국 대표사찰 구산산문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실감 콘텐츠를 통한 체험학습에도 유용하니 자녀와 함께했다면 참여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천년고찰 성주사지 천년역사관 전경.

    ▲ 천년고찰 성주사지 천년역사관 전경.


    천년고찰 성주사지 안내도.

    ▲ 천년고찰 성주사지 안내도.



    < 보령시 성주사지(聖住寺址)>

    ○ 위 치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심원계곡로 93 (성주리 104)

    ○ 연락처 : 041-933-6558 (성주사지 천년기념관)

    ○ 운 영 : 사지는 연중무휴 무료입장, 기념관은 월요일 휴무

    ○ 주차장 : 무료. 성주사지 기념과 주차장과 사지 주차장 이용

    ○ 취 재 : 2026년 1월 26일 등

     

    < 참고문헌 >

    임종태. (2014). 보령 성주사지의 가람변천(伽藍變遷) 연구. 선사와 고대, 42, 99-130.

    이정자. (2019). 성주산문 보령 성주사지의 문화적 가치 연구

    : Seongjusanmun Cultural Value Study of Boryeong Seongju Temple Site.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s://gsm.nricp.go.kr)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판독문(최연식, 『朝鮮金石總覽』)

    한국 사지(寺址)총람 증보판. 불교문화재연구원, 문화재청. 2021년

    전통사찰총서 12 - 대전·충남의 전통사찰 1, 사찰문화연구원, 1999년

    충청남도지정문화재해설집, 충청남도, 2001년

    충남지역의 문화유적 11, 백제문화권개발연구원, 1997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정보(https://www.khs.go.kr)

    충남디지털문화유산(https://www.chungnam.go.kr)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https://www.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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