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사진을 안 좋아한다. 이렇게만 말하기는 조금 애매할지도 모른다. 봄날에 만개한 벚꽃 사진은 좋다. 한 상 가득 푸짐하게 차려놓은 밥상 사진도 좋다. 하지만 거기에 사람이 더해지는 것은 싫다. 괜한 사족 같다.
원래 나에게 사진은 기억의 보조였다. 사진을 보면서 그때를 떠올리는 것이다.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았던 풍경을 사진으로 다시 보면 그 계절의 냄새가 풍겨온다. 또 거기에서부터 기억은 피어난다. 예를 들면 이런 기억 말이다.
“여름이었다. 초입에서부터 물을 잔뜩 마시는 바람에 함께 간 아빠한테 혼이 났다. 혼낼 거면 그냥 먼저 가라고 대꾸하자 아빠가 정말 나를 두고 앞서 나갔다. 나는 그 뒤통수에 대고,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가는 건 흉이지만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가는 건 흉도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사람이 나온 사진은 어떤가? 산에 가도 풍경은 뒷전이다. 산의 이름과 높이가 적힌 정상 표지석을 옆에 두고, 등산의 수고로움을 싹 다 지운 얼굴로 가뿐하게 웃고 있다. 이건 기억의 보조가 아니라 왜곡된 기록일 뿐이다.
보정 기술의 발달도 내가 사진을 더 싫어하게 만들었다. 서점에 가면 책 띠지에 들어간 작가 사진을 여럿 보게 된다. 그중에는 내가 실제로 얼굴을 아는 작가들도 있다. 당황스럽다. 거짓에서 시작해서 진실로 다가가는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사진은 진실에서 시작해서 거짓으로 달아나고 있으니까.
SNS를 할 때도 사람 사진에는 ‘좋아요’를 누르지 않을 만큼 한동안 이 마음은 강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기념사진을 찍으러 오라고 했는데, 그것도 거절하고 싶었다. 그래도 행사에는 참여해야 할 것 같았다. 관계자에게 마스크를 써도 되냐고 물었다. 마침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내부 논의가 필요하다는 답이 돌아왔고, 나는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며 그냥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나는 취향뿐 아니라 상식도 지닌 사람이다. 돈을 주는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는 건 상식이다.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웨딩 촬영을 하자고 했을 때도 순순히 응했다. 여기에서도 상식이 발휘됐다. 여자친구는 직장에 가고, 나는 직장에 가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둘 다 일을 한다. 그래도 엄연히 다르다. 여자친구가 하는 일은 ‘벌이’고, 내가 하는 일은 거의 ‘벌’이다. 벌이를 내주고 벌을 나눠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웨딩 촬영을 하면서 내 상식이 무너졌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서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