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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은행나무와 시원한 전나무 숲길이 멋들어진 곳

금산 보석사와 영규대사 유적지

2014.06.25(수) 21:20:32보이저(bohyeonlee@naver.com)


거대한 암반 위로 청량한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금산의 절경 십이폭포를 찾아가는 길에 자리한 보석사는 앞산에서 금을 캐어 불상을 조성하여 보석사라고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사찰로 천년은행나무와 영규대사의 흔적이 전해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보석사 주차장을 지나 절 입구인 일주문을 향해 가다 보면 일주문 뒤로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전나무 숲길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줘서 삼림욕장에 온 듯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보석사 전나무 숲길은 중간중간에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가을에 오면 푸르른 전나무와 노란 은행나무 알록달록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오색의 향연을 만끽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별천지로 변한다.
 


일주문을 지나 진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시냇물을 따라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을 올라가다 보면 보석사로 들어가기 위해 세워진 작은 나무다리 맞은편에 작은 언덕 하나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은행나무가 시선을 압도한다.
 
1,100년이 넘는 세월을 이 자리를 지켜온 보석사 은행나무는 나무의 높이가 34m, 가슴 높이의 둘레 10.72m의 크기로 뿌리 부분에 2∼3m 높이로 마을을 지키고 보호해주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져 해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대신제가 열리는데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전란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 내어 울었다고 전해진다.

 
천연기념물 365호로 지정된 보석사 은행나무는 보석사를 창건한 조구대사가 다섯 명의 제자와 함께 열반에 이르는 여섯 가지 방법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일컫는 육바라밀을 상징하기 위해 은행나무 여섯 그루를 심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로 합쳐져 지금의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그 자리를 지켜 오다 보니 사람 키를 훌쩍 넘어 하늘높이 34m가 넘게 자라고 나무의 두께는 대여섯 사람이 서로 손을 마주잡고 둘러야 겨우 닿을 정도로 두꺼운 10m가 넘는 두께로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이곳에서는 영물로 생각할 정도로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민속적·생물학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0년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되었다.



보석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승군의 3대 병장으로 불리는 영규대사와 관련된 흔적들이 남아있는데 일주문 바로 왼편에 자리 잡은 승병장 영규대사의 ‘의병승장비’와 대웅전 옆에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기허각, 영구대사가 주로 머물렀다는 요사채인 의선각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규대사는 승병 1천 명을 규합하여
의병장 조헌관 함께 청주성 탈환하였으나 금산에서 1만 5천의 왜군에 맞서 700명의 의병이 장렬히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비운의 현장으로 칠백의총이 그날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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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현강왕 12년(886)에 조구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천년고찰 보석사에는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지켜온 은행나무만 전해오고 사찰 내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143호로서 지정된 조선시대 말에 건축한 보석사대웅전과 기허각, 의선각 등의 건물들만이 남아있지만 고즈넉한 사찰 분위기가 천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다.

 


금산 보석사 / 천연기념물 365호 보석사은행나무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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