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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仙掌)

노을포 공원이 있는 고장

2024.01.31(수) 18:46:12춘당(yosaebi45@daum.net)

    오랜 역사를 지닌 온천의 도시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아산시의 서쪽 지역에
    드넓은 곡창 평야를 이루고 있는 선장면은 명칭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고장이다.
    신선의 손바닥을 뜻하는 仙掌(선장)이란 지명은
    삼봉청람 8경(三峰靑濫 八景)의 푸른 요람 아래 면소재지가 설치되며 유래되었고
    삽교천과 무한천 언저리에는 '소들강문'의 드넓은 농경지를 갖추고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으며 갯벌에는 해산물도 넉넉한 곳이었다.
    또한 아산만을 통하여 소금과 곡식을 서울로 운반하던 포구였기에
    물류의 유통이 활발했고 세상 소식도 빠르게 전달 되는 곳이었다.




▲ 선장면 주민자치 센터


행정복지 센타(면사무소)

   세상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덕에 1919년에 일어났던 3.1만세운동 소식이
   이곳 지역민들에게 빠르게 전달되었고 이에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삭이던 지사들은
   과감히 동지들을 규합하여 4.4 독립만세를 부르며 단호히 일제에 저항하였다.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4일 선장면 장터에서 부두 노동자들과 주민 600여명이 시위를 하며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다 1명이 순국하고 114명이 체포된 항일 독립 운동이었다.



    그날의 함성을 재현한 '만세 운동 동상'이 옛 현장이었던 장터 복판에 조성되어
    후학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농부와 부두 노동자, 그리고 부녀자들 까지 동참한 의거는
  참가자들에게 가혹한 고문과 옥살이, 체벌이 가해졌다.
  현장에서 총살된 1분의 순국열사와
  1년에서 2년 6개월의 감옥살이를 한 여섯분의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민중들이 40~60대의 태형(笞刑)을 받아야 했으며
  이후 평상시에도 감시와 핍박을 견뎌야 하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순국지사 1분과 애국지사 6분의 명단

    그날 부르짖었던 독립선언서 전문을
    이희승 선생의 한글말 풀이로 오석에 새겨 실감토록 하였다.



   1910년에 국권을 일제에 침탈 당한 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도 들불처럼 번져나갔으며 여러 형태의 저항은 계속 이어져 갔는데
   당시 선장면 지역 만세운동은 정수길(규희) 지사가 주도하였다.
   동학농민혁명군 신창 접장 정태영의 아들인 그는 1907년 천도교에 입교(入敎)하고
   신창의 사립 신민 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손병희 선생의 수제자 중 한 분이었다.


동상의 가운데가 정수길 지사

   정수길지사는 면소재지인 군덕리 출신으로 임천근(군덕리), 서몽조(돈포리), 오상근(돈포리)
   김천봉(인주 도흥리) 등의 지사들과 독립만세 운동을 결의 하고
   선장면 각 마을 주민들이 적극 참여 하도록 규합하였는데
   선장과 함께 동학의 교세가 강했던 도고면 각 마을 주민들도 이 거사에 함께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리 하여 1919년 4월 4일 선장 장터에서 수백명이 참가한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어
   정수길지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동료지사들과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참가자들은 다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후
   거사를 도모한 지사들은 몽둥이를 들고 앞장 서서 시위대를 이끌며 주재소로 몰려갔다.
   일본 헌병 조장(장사손삼랑)이 공포탄을 쏘며 해산을 강요하였으나
   시위대가 더욱 격렬하게 돌진하자 경찰은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앞장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최병수 열사는 총에 맞아 순국하였고
   일곱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시위대도 결국 해산하고야 말았다.
   이 날의 시위를 주도했던 정수길지사를 비롯한 다섯분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모두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정수길지사는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 갔다가 공주 형무소로 이감되었고
   나머지 의사들도 공주 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은 뒤 모두 형기 만료로 풀려났다.



   이 외에 선장면의 적극 참여자 100여명 중 52명은 태형 60도, 57명은 태형 40도를 맞았고  
   도고면의 적극 가담자 80명도 태형을 당하였으며 고령의 한 참가자는 벌금 10엔을 물어야 했다.
   이 후에도 정수길지사는 1926년 6.10 만세 운동과 1927년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였고
   1938년의 멸왜(滅倭) 기도 운동과 독립자금 모금 활동이 발각되어
   온양 경찰서에서 13일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러한 선장면 독립만세운동의 숭고한 공적을 기리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최병수 열사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정수길, 임천근, 서몽조, 2007년에는 김천봉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아산시(복기왕 시장)는 2017년 12월 31일에 선장면 소재지 종합정비 사업으로
   이 곳에 현충 시설을 설치하고 선장 4.4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 뜻을 후세에 남기고자 이 기념시설들을 세웠다.



   애국지사 정수길지사의 자택을 안내하는 이정목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정수길의사 집터


정수길과 정태영 부자의 집터 표시석

   기미독립 무인멸왜운동
   1919년(기미년) 4월 4일 최병수, 정규희(수길), 임천근, 서몽조, 김천봉, 오상근 등 600여분의
   주민들이 아산시 선장면 장터에 모여
   정규희의 독립선언서 낭독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주재소로 행진 하여
   돌과 곤봉으로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의 강렬한 시위 운동이 있었다.
   또한 1938년(무인년) 천도교의 '멸왜 기도운동'에
   선장, 온양, 신창, 둔포 지역에서 정규희(수길)를 비롯한
   이규호, 이중신, 강창주, 이보성, 이창운 등 6분의 천도교 지도자들이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3일간의 혹독한 고문을 당한 <무인왜멸운동>도 있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한 큰 발판이 되었으며
   이에 선장면 유지 제현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활동한 선열들의 정신을
   추모하고 계승하기 위해 2005년 8월 15일 이 기념탑을 건립하고
   후면에 순국선열들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기미독립 무인멸왜운동 기념탑



   이러한 민족의 수난사가 간직된 선장에는 애국 정신뿐만 아니라
   수려한 자연 경관도 갖추고 있어 삽교천의 황홀한 해넘이 풍광과
   낚시와 캠핑을 즐길 수 있는 '선장포노을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캠퍼들과 조사(釣士)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캠프 사이트

   뿐만 아니라 아산의 선장과 당진의 우강을 연결하는 '선우대교' 주변으로는 
   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떼지어 다니는 각종 철새들의 무리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며
   봄부터 가을까지는 광활하게 펼쳐진 한껏 여유로운 들 풍경이
   넉넉함과 풍족함을 맛보게 하는 경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근거리에는 서해안 전철이 지나 다닐 긴 다리가 놓여졌고!


2024년 6월 개통 예정인 서해안 전철교

    다리 아래 강물에서는 큰고니를 비롯한 오리떼와 기러기들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한다.



   전설에 나오는 '신선'의 손바닥을 실제로 볼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민족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선장은
   신선의 손바닥처럼 신비롭고 흥미로운 볼거리로 많은 호사가들의 관심을 받을만 명소임이 분명한 곳이다.


기미독립무인멸왜운동기념탑
충남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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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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