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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성지로 지정 된 해미읍성 일원

해미읍성과 여숫골을 연결하는 해미천 벚꽃으로 물들다

2021.04.07(수) 01:22:28연필(ins503@hanmail.net)

해미읍성 일원
세계인의 국제성지가 되다

해미천은 지금 벚꽃이 활짝 피어 있고 먼저 핀 꽃들은 꽃잎이 지고 있다.
이 모습이 마치 국제성지로 지정 된 것을 기뻐하는 듯이 꽃잎으로 주변을 물들이고 있다.

서산시 해미읍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된 성곽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3대 성곽의 하나중의 하나이다.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이 3대 성곽으로 꼽힌다.

이 성을 축성하게 된 이유는 경상남도에 이어 두 번째로 충청남도가 왜구의 침입이 많았기 때문이다.
1417년(조선 태종17년)~1421년(세종3년) 동안 축조가 진행되었다.
1577년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10개월간 이 곳에서 근무하였다.

해미읍성은 성 안쪽에 계단식 석축을 쌓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고 외벽은 돌로 쌓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성벽이 배를 내미는 현상이 나타나서 지금은 한창 보수 중이다.

성곽의 높이는 5m정도이며 길이는 1.8Km이다. 면적은 성안이 3만평 정도이며 뒤 쪽의 소나무 숲은 3만평으로 총 6만평의 규모이다.

성곽의 돌에는 공주, 청주, 부여 등의 지명이 생겨져 있는데 부실 공사를 막기 위하여 각자석 즉 현재의 공사 실명제를 시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읍성의 정문은 진남문이다. 임금이 계신 북쪽을 공격하려는 기운을 억누르려는 뜻이 담겨있다.

육군의 충청병영성이 해미읍성에서 청주로 옮긴 후에 호서좌영이 설치되었다.
호서좌영은 충청도 5군영 중 하나로 영장이 머물고 군사와 민정을 관여하였다. 영장은 도적이나 반란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의 임무를 맡았었다.

충청도 내포지역의 신자들은 토포사를 겸하는 영장이 있는 해미진영으로 끌려와 처결되었기 때문에 해미읍성이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 된 것이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해미읍성에서 순교하였다.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을 회화나무(호야나무)에 매달아 형벌을 가하였는데 아직도 감옥 앞에는 호야나무가 우뚝 서 있다.
서산의 해미순교성지가 지난해 11월 29일에 교황청에서 승인한 국제성지로 지정 되었다. 그리고 올해 3월 1일에 국제성지로 대내외적으로 선포 되었다.
해미순교성지가 국제성지로 지정됨에 따라 해미읍성이 더욱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다.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행정업무를 보던 곳이다. 안 에는 집무 보는 모양으로 꾸며져 있고 버튼을 누르면 동헌의 역할에 대한 해설이 나와서 궁금한 관광객들에 도움을 준다.
동헌 뒤편의 부속 건물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관광객들에게 오전과 오후에 각 각 한 번씩 창을 불러 준다.

객사는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이다. 그러나 중앙에는 궐패를 놓고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장소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객사 뒤편 담 안에는 수령의 가족들이 거주하던 내아가 위치해 있다. 안에는 적막만 흐르고 꽃눈을 가득 담은 아름드리 보다 더 큰 명자나무가 꽃 필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해미읍성의 바깥에는 5미터 정도의 해자가 설치된 흔적이 있다. 이곳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탱자나무를 심어서 탱자성으로도 불린다. 감옥 뒤편으로 심어 놓은 탱자나무가 지성임을 알려 주고 있다. 무궁화나무와 터널을 이루고 있는 장미꽃이 여름을 기다리고 있는 해미읍성은 관광객들이 찾아 와서 관심을 가질 때에야 완전체를 이룰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해미읍
성은 성벽과 진남문만 옛 모습이고 나머지는 재현 되었거나 복원 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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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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