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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귀촌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시골창업일기2> 시골에 사는 '못난이 콤플렉스'

2017.07.16(일) 16:39:00솔이네(siseng@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청년이 시골에 살면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다. 신문, 방송에 노출될 기회도 많아진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젊어서 시골에 오면  "인간극장 출연 요청을 받았는데, 거절했어." 이런 말은 자랑이 못 된다.
 
충남 홍성에서 귀촌한 동료들과 함께 창업한 '로컬스토리 미디어협동조합'도 언론에 종종 소개되는 일이 있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살아가는 청년을 취재하고 싶다는 방송사의 의뢰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신문에 나오고 방송 요청이 온다고 해서 로컬스토리가 잘 나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골에 청년이 귀할 뿐이다. 

최근에 로컬스토리를 소개한 기사가 한 포털사이트 메인에 떴다. 순식간에 조회수가 1만이 넘더니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 우호적이지 않았다.
 

"저건 몇 개월 할지"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지...저것도 먹고살만하니 내려간 거 아닐까요?"
"호기로 농사짓겠다고 내려가 겨우 몇 개월 해보고 안 되겠다고 포기를 합니까?
그러고 나서 무엇을 전달하겠다는 건지..."

로컬스토리 멤버인 나디아가 일간지에 연재하는 귀촌일기의 댓글은 더 가관이다. 

"빨리 도시로 나와라. 이게 힘들다면 무슨 귀촌이냐"
"삶이 놀이터냐. 땀 안 흘리고 편하게 사는 것이 자랑이냐."
"행복만이 최선인가. 행복만 가득하면 인생은 나태해진다.
나만의 행복을 버리고 도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물론 비난부터 하고 보는 댓글문화, 귀농귀촌 성공 사례를 부풀려 떠들어대는 언론에 대한 반발감이 섞여서 나온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산다고 하면 대다수는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신기하니까 신문, 방송에서 소재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도시가 더 이상 살 곳이 못 되지만, 아직 '청년 시골행'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은 곱지 않다. 시골에 내려가면 왠지 삶이 안일해 보이고, 시골을 떠나 도시에 입성하지 못한 청년을 '못난이'로 보는 꼰대들의 편견이 있다. 

 

네이버 팜 메인에 걸린 로컬스토리 소개 기사

▲ 네이버 팜 메인에 걸린 홍성 로컬스토리 소개 기사


서른 살에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귀촌을 결심했을 때, 아버지께 미리 알리지 않았다. 반대하고 걱정하실게 뻔했기 때문이다. 시골집에 직장까지 구한 다음 연락을 드렸다. 

"서울로 다시 올라갈 때까지 앞으로 아버지한테 연락할 생각 마라."

아버지는 부자의 연을 끊자고 하셨다.(아버지는 대한민국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표 꼰대'시다.) 없는 살림에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보내 놨던 장남이 '촌구석'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께서 느꼈을 참담함을 이해한다.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했으니 실망감이 크셨을 거다. 하지만 내가 살아갈 인생은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다. 

부자의 연이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홍성으로 귀촌한 지 6개월 만에 부모님이 귀촌한 시골집을 들르셨다. 잠깐 우리 집을 자랑하자면 해방 직후인 1946년, 대목수가 지은 한옥집으로 넓은 다락방이 있고, 여름이면 큰 풀장을 펼쳐 놓을 수 있는 마당, 그 앞에는 150평 정도 되는 정원 같은(풀로 덮여 있을 때가 많지만) 텃밭이 있다. 서울 봉천동에 살던 집은 10평 남짓이었지만, 지금 사는 곳은 대지가 598평이다.(시골집은 불편하다. 시골집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길 바란다. 그냥 자랑일 뿐이다.) 아버지는 어린 손자들이 마당에서, 밭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셨다. 

"애들 클 때까지는 시골에 있어도 되겠다."

아들의 '시골행'에 대해 아버지는 묵인하셨다. 가끔 전화하셔서 "언제까지 시골에 내려가 있을 거냐? 도시로 언제 올라갈 거냐?"(여전히 부모세대에게 시골은 '내려오는 곳'이고 도시는 '올라가는 곳'이다.)고 물으셨다. 그때마다 아버지를 안심시켜야 했다. 평소 아들의 결정을 지지해주셨던 어머니도 "네가 장남인데 시골에서 안주하며 살까봐 걱정"이라고 하셨다. 

명절이나 결혼식날 친척들을 만나면 나도 괜히 주눅이 들었다. 사실 내 몸 한 구석에도 꼰대들의 걱정과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골 삶이 스스로 만족스러웠지만 떳떳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친척들은 대기업에 다니는지, 연봉은 얼마를 받는지, 어떤 차를 끌고 왔는지가 중요했다. 삶의 기준이 다른 사람이었다. 나도 은근히 그 시선이 신경 쓰였다. 친척들을 만날 때면 중고로 산 2002년식 승용차를 깨끗이 청소하고 광을 냈다. 

내가 시골에 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더 이상 친척들에게 아들 자랑을 하지 않으신다. 물론 나도 여전히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다. 그런 고민을 할 때마다 시골행을 권했던 아내가 한마디 한다. 

"스스로 자랑스러우면 됐지, 왜 다른 사람 기준에 맞추려고 해?
부모님께 인정만 받으면 여보는 행복해져?"


그런 아내의 응원 덕분에 직장을 그만두고 하고 싶을 일을 찾아 헤맸다. 스스로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부모님도 언젠가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정말 행복해질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시골에서 창업까지 하면서 부모님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돌아섰다. 시간이 더 흐르면 반을 차지하고 있는 걱정이 대견함으로 바뀔 거라고 확신한다. 

꼰대들은 청년들의 '시골행'을 패배주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도시에서 버티지 못해 시골로 내려간 '못난이'.(지방에 남아 있는 젊은 친구들 중에 '못난이 콤플렉스'를 가진 친구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도시의 삶을 버리고 시골을 택한 것은 인생에 몇 안 되는 큰 도전이다. 기존의 삶의 방식을 버리는 것은 웬만한 용기 아니면 실천하기 쉽지 않다. 

시골에서 만난 귀촌청년들 대부분 나름의 꿈이 있었다. 농사가 좋은 친구는 농부로, 나무를 만지는 것이 좋은 친구는 목수로, 정원을 가꾸는 일이 좋은 친구는 원예가로, 글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는 작가로 살아간다. 시골 삶은 매 순간 도전의 연속이다. 도시에 비해 갖춰진 것이 적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살아가려면 스스로 모든 일을 꾸려야 한다. 거기에 시골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아서 살아가려면 얼마나 고민하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남들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는 도시의 수동적인 삶을 버린 친구들이다. 취업을 위해 요구하는 각종 스펙들, 끝없이 오르는 월세와 전세, 끊임없이 비교와 경쟁을 강요하는 도시의 기준을 과감히 던져 버린 것이다. 지금 행복한 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잘 사는 건지 고민하고 실험하며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시골에 많다. 

이런 친구들에게 '자신만의 행복을 버리고 도전의식을 가지라'느니, '삶을 (만만한) 놀이터로 보느냐'느니, '또 몇 개월 하다가 그만두겠지' 등등의 말을 던지는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보다 더한 '대한민국 일등 꼰대'들이다.(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이 시골에서 창업했다고 하니 걱정하면서도 지지하신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일등 꼰대들에게 한마디.

"귀촌청년들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안락하지만 수동적인 도시의 삶을 
너는 한 번이라도 버려봤는가?" 

진짜 해주고 싶은 한마디.

"너나 잘 사세요."

*이 글은 글쓴이의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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