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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문화창조의 요람, 충남

내포칼럼 - 최혜진 목원대 교수

2024.05.14(화) 13:36:52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문화창조의요람충남 1

문화창조의요람충남 2


충청지역 메가시티론은 충남, 충북, 대전, 세종을 묶어 하나의 경제권, 생활권, 문화권으로 도약하겠다는 정책 제안이다. 중원에 있지만 서울 경기나 전라도 경상도에 비해 무언가 늘 소극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차에 무척 선도적인 발상이라고 느껴진다. 충청도는 대한민국 중간에 있으면서 경기도와 강원도, 전라도와 경상도를 모두 접변으로 가지고 있는 특별한 지역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다양한 지역의 문화가 흘러들어오기도 하고 흘러 나가는 통로이자 허브 구실을 했던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충남은 예로부터 문화창조의 요람 구실을 하였다.

충청도는 조선시대만 해도 팔도 문화의 중심이었던 것같다. 그것은 임금이 있는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포구나 평야 등 물산이 풍부하고, 언제든 서울로 급히 갈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지금으로치면 전국예술인총연합회 회장쯤 되는 역할은 충청도 예술인들이 맡았고, 전국의 예술문화를 리드하는 입장에 있었다. 서울에서 과거시험이 있을라치면 전국의 광대들이 당시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에 모여 소리과거를 치르는 전통이 있었고, 일류 광대를 선발하여 궁중에 보내는 일도 충청도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판소리는 바로 충청도 양반들로부터 시작된 국민장르다. 판소리는 애초 각 지역의 이야기를 재담과 노래를 섞어 하던 장르였으나, 18세기 결성 지역의 최선달(최예운, 1726-1805)과 목천 지역의 하한담(생몰 미상)에 의해 예술적인 장르로 급부상했다. 최선달은 결성 석당산, 누에산, 형산 등지에서 소리를 연마하며 득음을 하고, 한양으로부터 온 관리의 눈에 띄어 어전에서 소리했으며, ‘가선대부’의 벼슬을 받았다. 소리를 해서 벼슬을 받은 최초의 사례다.

최선달이 소리를 배우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오는 제자들을 가르치느라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던 하인이 도사에게 제발 손님좀 그만 오게 해달라고 하소연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최선달이 당대에 이미 소리로 유명했고, 드디어 판소리의 정체성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전주신청에서 최선달과 하한담이 불렀던 <춘향가>는 금세 인기를 얻었고, 또다른 비가비(양반) 광대 권삼득이 그 뒤를 이어 판소리를 발전시켰다. 유명한 <흥보가> 중 ‘제비몰러 나간다’ 대목은 권삼득이 만든 것이다.

결성에 최선달과 목천의 하한담이 최초의 판소리 명창이라는 점은 기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이 부른 판소리 사설을 지은 사람은 별도로 있었다. 그가 바로 목천의 유진한(1712-1791)이다. 유진한은 목천지역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고 문장이 뛰어나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정치적 탄압으로 실각한 남인 가문이었다. 하지만 유진한은 최초의 <춘향가>를 지은 작가로 지금 판소리사의 첫머리에 올라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랴. 유진한은 호남지방을 여행하며 들었던 춘향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당시 유행하던 이야기노래인 ‘타령’의 사설을 지었다. 그것이 <가사춘향가이백구>인데, 이 <춘향가>는 한자로 기록이 되어 있어 아쉽지만, 최선달 하한담을 통해 판소리 <춘향가>로 불리어졌다. 양반과 기생의 사랑이야기로 기생 춘향이 이어사의 정실부인이 되어 정렬부인에 올랐다는 스토리를 최초로 만들었다. 또한 유진한은 충청지역 문사들 전체를 모아 시 경연대회를 성대하게 열었고 그 시회를 통해 충청지역 문화를 크게 진작시켰다.

유진한의 절친으로 서천의 신광수(1712-1775) 역시 내로라 하는 문장가 집안을 이루었다. 그와 세 동생들, 아들 사형제가 서천의 팔문장가로 꼽힐 만큼 문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신광수 역시 과거에 합격만 하고 벼슬을 받지 못한 채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가 과거 합격 후 열었던 잔치에서 광대 원창이 소리를 했다. 하지만 소리값을 줄 수 없었던 신광수는 원창의 부채에 시 한 수를 써주었다. 원창이 10년 후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을 때 임금이 신광수의 시를 보시고, 즉시 신광수에게 벼슬을 내렸다. 신광수는 영릉(효종대왕릉)의 참봉이 되어 여주에서 3년을 지내며, 당시 처음으로 ‘시조’를 불렀던 이세춘에게 시조 사설을 지어 주었다. 

신광수는 이보다 앞서 과거시험에서 2등했던 시가 평양 교방에서 노래로 불리워져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서도창 <관산융마>가 그것이다. <관산융마>는 평양 기생이 소리 시험을 볼 때 필수 작품이었을 정도로 중요했고, 당시 노래를 잘 불렀던 모란이 나중에 궁중에 잔치 참여를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관산융마>의 작가이며, 시조 사설의 작가이기도 했던 신광수는 당대 일류 작사가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친구 채제공(1720-1799)이 평양감사로 부임했을 때 지어준 <관서악부>는 또다른 친구 강세황(1713-1791)이 친필로 기록을 남겨줄 정도로 명작이었다.

특히 충남지역에서 발전한 문화의 바람은 18세기만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쳤다. 최선달, 하한담, 유진한, 신광수 등 예술인과 문화인들이 함께 만들어 낸 당시 예술문화는 충청을 넘어 전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들이 만든 판소리는 지금 세계의 문화유산이 되어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었다. 문화창조의 요람이었던 충남이 중고제를 더욱 활성화하고 다시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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