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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이삼평공원에서 만난 이삼평

주말에 나들이 갔다가 ~~~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94-64

2024.05.08(수) 23:16:40 | 모닝스타 (이메일주소:gkgk2023@naver.com
               	gkgk202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나들이 갔다가 이삼평 공원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이삼평공을 소개합니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1

이삼평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아리타도기[有田燒:伊萬里燒]의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한국 출신 도공이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의 한 사람이다.
그의 도자기는 일본 전국으로 퍼져 이마리도기라는 별칭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그에 의한 아리타도기의 창시는 일본 도자기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리타 시민들은 그가 가마를 연 300주년인 1916년 비를 세우고, 1917년부터 거시적(擧市的)인 도조제(陶祖祭)를 열고 있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2
일본자기시조 이삼평공기념비

공원 안에 우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자와 일본어로 표기되어 있어 궁금함이 더했다.
나무 그늘도 적었고 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러했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3

안내문을 읽어 내려가다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역사를 보면 신념을 가지고 꿋꿋하게 산 선조들의 업적은 큰 감동을 준다.
아무리 감추려해도 진실된 역사는 말을 한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4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 동쪽 이즈미산에서 백자광을 발견하고 일본 최초의 백자기 생산에 성공하여 일본자기의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이곳의 비는 1990년 10월 아리타 시민들이 기금을 조성하여 공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뜻과 국제친선 및 문화교류의 소망을 담아 공주시와 사단법인 한국 도자문화 진흥협회의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5

처음에 세워진곳은 북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산 33-1 박정자삼거리 인근이었으나,
국도확장공사에 편입됨에 따라 공주시에서는 계룡산국립공원과 용수천이 잘 어우러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94-64 현 위치에 이삼평 공원을 새롭게 조성하고 이전하였다.

이삼평도자문화제는 일본 자기의 시조인 이삼평 선생을 기리는 행사로 지난 2013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6

기부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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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자들의 명단이 일본 현지인들이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8

이삼평이 조선에 살 때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출생지가 충남 공주(1990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에 기념비가 세워짐)로 추정되지만, 경남 김해설과 전북 남원설도 있다.
공주 근처에서 발견된 조선 시대 도편(陶片)들과 아리타 지역의 초기 도편들이 같다는 점이 공주설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9
2020년 10월 이달의 공주역사 인물


공주시에서는 2012년부터 헌다완, 헌다례로 매년 이삼평을 추앙하는 행사를 하고 있으며, 2020년에는 10월의 역사인물로 이삼평을 선정하였다. 

일본으로 끌려간 이삼평은 나베시마의 사위이자 가신인 다쿠 야스토시(多久安順)에게 맡겨졌다. 나중에 이삼평은 가나가에 산베이(金ヶ江三兵衛)라는 일본 이름을 얻는데, 출신지 공주의 금강(錦江)에서 한자를 바꾸고 ‘삼평’이라는 조선 이름의 발음을 따랐다는 설이 있다. 가나가에 산베이, 즉 이삼평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653년경의 기록으로, 이삼평 자신이 다쿠 가문에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삼평은 일본에 도착한 다음 몇 년간 다쿠 야스토시를 위해 일했으며, 18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쿠 지역에서 아리타로 1616년에 이주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10

이삼평의 첫 자기 생산을 시작으로 아리타 지역에는 자기 가마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이에 나베시마번 측은 어지러워진 생산 체계를 정리하고 자기의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자기장들을 중심으로 13개의 가마로 재편했다. 또한 가마들을 관리하는 기관을 설치하고 효율적인 분업 체계를 만들었다.
이삼평의 첫 자기 생산 이후 나베시마번의 적극적인 후원이 더해지면서 아리타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가 되었다.
나베시마번에서 생산되는 자기는 청화백자와 오채자기가 주를 이루었고, 크기가 규격화ㆍ표준화되고 색상이 다채롭고 호화로운 편이며, 공예품적인 디자인 특성을 지녔다. 대량 생산과 판매를 위한 산업 생산품으로서의 성격이 컸던 것이다.
조선 자기장들의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명나라 도자 양식을 수용하고 거기에 일본의 전통 회화나 공예의 색상과 문양 등을 적용시킴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11

아리타 자기의 세계 수출과 명성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50년 1백45개의 일본 자기를 구입했다. 
일본 최초의 자기 수출이었다. 이후 1659년에는 5만6천7백 개의 아리타 자기를 주문했다. 
유럽에 대량 수출된 아리타 자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일본 자기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7세기 중후반 당시 중국은 이른바 명청(明淸) 교체기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오삼계(吳三桂)의 반란까지 일어나 자기 생산과 수출이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정세도 아리타 자기의 유럽 수출에 영향을 미쳤다. 
아리타 자기를 이마리(伊萬里) 자기라고도 하는데, 아리타에서 가까운 이마리 항구로 옮겨 출하했기 때문이다. 첫 수출 뒤 70년 동안 약 700만개의 아리타 자기가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지금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 사들인 아리타 자기가 소장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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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물고기 항아리들이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13

‘도자기 전쟁’과 조선의 자기장들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할 정도로, 왜군은 조선의 자기장들을 사로잡아 데려가고 조선의 도자기를 가져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도자기 전쟁’에서 범위를 넓히면 ‘문화 약탈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초기부터 도서부(전적), 공예부(장인), 포로부(한의사, 젊은 남녀), 금속부(병기, 금속 예술품), 보물부(금은보화), 축부(가축) 등의 별도 부대를 편성하여 조선의 문물과 인력을 약탈했던 것이다.
다카도리야키(高取窯), 사쓰마야키(薩摩窯), 아카노야키(上野窯) 등 일본의 많은 주요 도자기 생산지들이 끌려온 조선 자기장들에 의해 발전했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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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평공원 이용안내

쾌적한 공원 유지를 위하여 아래 사항을 제한하오니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공원내 취사 및 야영금지
오물, 쓰레기 무단투기 금지
고성바가, 음주가무, 무단방뇨

꼭 지켜주시길 소망합니다. 

이삼평공원에서만난이삼평 15

도자기를 모르지만,
도공의 숨결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과거나 현재나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신념을 가지고, 뜻을 이루는 사람은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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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석돌이 공원을 지키고 있다. 남녀합체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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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형상의 석돌이다. 아는 것이 부족하여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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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과 용수천이 흐르는 곳인데, 맛집 찾아가는 차량 외에는 인적이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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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평공원이 더 활성화되고, 나무그늘도 더 많고, 도란도란 즐거운 장소이기를 희망한다.
오늘은 뭉클한 마음으로 공원을 돌아보고 간다. 


이삼평공원
충남 공주시 구모동길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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