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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계룡 사계 솔바람 길 따라 주유천하에 빠지는 것도 힐링

두마면 가을 들판, 보기만 해도 넉넉

2023.11.20(월) 17:43:22 | 홍경석 (이메일주소:casj007@naver.com
               	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사계 솔바람 길 안내판
▲ 사계 솔바람 길 안내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집안이 화려했다.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이다. 아들이 김집(金集)이다.
 
정겨운 돌담
▲ 정겨운 돌담

1560년 송익필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과 평시서봉사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奉事)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산책하기 딱 좋은 길
▲ 산책하기 딱 좋은 길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를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래등처럼 너른 집에서 나도 살고 싶네
▲ 고래등처럼 너른 집에서 나도 살고 싶네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도농도시의 복합
▲ 도농도시의 복합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어느새 단풍도 다 지고
▲ 어느새 단풍도 다 지고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했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친근한 기와집
▲ 친근한 기와집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추수를 마친 논에는 정적이 감돌고
▲ 추수를 마친 논에는 정적이 감돌고

그는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길거리 커피의 달달함이라니
▲ 길거리 커피의 달달함이라니

독립운동가 서장환(徐章煥) 선생 주거지 역시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독립공채모집위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였다. 한국독립청원서를 만들어 미국 선교사를 통해 화부(華府)에서 개최하는 세계군축회의인 태평양회의에 전달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상해로 망명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떠나지 못했다. 결국 계룡산으로 피신, 동흥의숙(東興義塾)을 세워서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가 서장환 선생 주거지
▲ 독립운동가 서장환 선생 주거지

모처럼 충남 계룡시 두마면의 ‘사계 솔바람 길’을 따라 주유천하(周遊天下)에 빠지는 힐링을 누렸다. 두마면의 가을 들판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졌다. 정겨운 돌담과 우리 정서에 친근한 기와집도 마치 지난 시절 고향을 찾은 듯 포근했다. 길거리 커피의 달달함도 지금의 좋은 계절을 풍미(風靡)하는 듯했다.

미래의 동량을 키우는 두마초등학교
▲ 미래의 동량을 키우는 두마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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