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문화·역사

이순신 난중일기 일본 유출 ‘하루 전’ 극적 회수

격동의 충남 100년 - 현충사 난중일기 도난 사건

2023.11.05(일) 23:37:42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난중일기 도난사건 현장검증. /e영상역사관

▲ 난중일기 도난사건 현장검증. /e영상역사관

난중일기. /국가문화유산포털

▲ 난중일기. /국가문화유산포털




1967년 12월 31일 새벽 범행
국보 도난 대형사건 관심 집중

박정희 대통령 특별담화 발표
경찰에 검거 지시·범인엔 자수 권유
연탄창고에 숨긴 도난품 찾아내



부산에서 오랫동안 골동품상을 하던 유근필(당시 37세)은 이미 1966년 통도사에 있던 문화재를 훔쳐 모 재벌총수에게 밀매한 혐의로 9개월 징역형을 받은 전과자이다. 따라서 그는 전국적으로 어디에 값나가는 문화재가 있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1967년 11월 어느 날, 유근필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남철, 정선찬 등에게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 중인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훔쳐 일본에 팔면 1000만원은 받을 수 있다고 입을 열었다. 지금 화폐 가치로는 3억~4억원 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이들은 무거운 물건도 아니고 책 몇권에 그런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이남철과 정선찬은 즉시 행동에 나서 12월 24일 온양 현충사를 찾아 현지답사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범행 일자를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느라 경비가 느슨한 12월 31일 밤으로 정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추웠다. 그래도 일확천금을 번다는 생각에 추위를 참으며 현충사 뒷산에 숨어 밤이 깊어 가기를 기다렸다. 밤 10시가 넘어 사방이 고요한 시간, 이들은 현충사 전시실 굳게 닫힌 철문에 접근했다. 그때 만 해도 CCTV도 없고 자동경보장치도 설치하지 않아 이들은 마음 놓고 가져간 장비로 문을 뚫었다. 잠금장치 부분을 너비 7㎝, 길이 23㎝를 도려내니까 전시실 문이 쉽게 열렸다. 그러자 이들은 현장답사 때 보아둔 위치로 가서 임진일기 전권, 임진장초, 서간첩 등 10권을 닥치는 대로 손에 넣고는 재빨리 현장을 떠났다.

전시실에 접근하여 현장을 벗어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40분.

이순신난중일기일본유출하루전극적회수 1


이렇게 국보 76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하룻밤 사이에 도둑을 맞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1968년 1월 1일 새해를 맞았다. 그날 아침 현충사 직원이 경내를 순찰하다 지난밤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을 발견하고는 온양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이 대형 뉴스는 곧 전국에 알려졌고 진해에 머물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전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새해 부푼 희망을 이야기할 연초에 온통 국민의 관심은 난중일기 도난 사건에 집중됐다.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범인들의 자수를 권유하는 한편 경찰은 10일 안에 범인을 검거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이 범인 검거와 자수를 권유하는 담화를 발표하기란 매우 이례적인 것. 그만큼 국민의 관심이 높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당시 채원식 치안국장이 현지에 내려와 수사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등 긴장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종중 인물로 이 모씨(당시 33세)를 지목하고 수사를 벌였다. 그가 평소에는 종중 모임에 잘 참석도 않다가 사건 임박해서 현충사를 찾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난중일기를 보고는 ‘한 장만 떼다 팔아도 큰 돈이 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 의혹을 사게 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정밀 추적한 결과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풀어 주었다.  

충무공 이순신 동상. /한국관광공사

▲ 충무공 이순신 동상. /한국관광공사


온양에 자주 드나들던 일본인들도 수사 대상에 오르고 깊이 파고들었지만 하나도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서울을 비롯 전국에 걸쳐 골동품상을 추적하는가 하면 문화재 전문 전과자들 리스트를 작성하고 파고들었지만 역시 허사였다. 경찰은 대통령이 정한 시한이 다가오면서 당황 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1월 9일 오전 11시, 당시 부산 경찰국 정석모 국장(충남 공주출신·前충남지사·내무부장관·現 정진석의원의 부친)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난중일기 절도범으로 보이는 일당이 부산 온천동 어느 다방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적 제보를 한 사람은 박정웅(당시 30세), 황규하(당시 29세). 이들은 다방에서 옆자리에 있던 손님 몇이서 ‘일본 밀항’‘문화재…’하는 소리를 듣고 직감적으로 난중일기 범인들이라 생각하고 이들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이들 일당이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힌 박정웅과 황규하는 정석모 부산 경찰국장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 직접 경찰국장을 찾아가 그들이 파악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정석모 국장은 즉시 비상을 걸어 형사대를 급파하고 범인들이 도피할 만한 곳에도 형사들을 잠복 시켰다. 그리고 오후 4시 20분 부산  온천동 급행 버스 정류장에서 막 버스에 오르려고 하는 주범 류근필을 체포했다. 공범 중 하나인 이영환의 집 연탄 창고에서 훔쳐 간 난중일기도 찾아냈다. 수사가 이렇게 급진전하자 공범으로 사전에 현충사 현장답사를 했던 정선찬이 부산 금정산 금강 공원에서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경찰은 난중일기 외에 잃어버린 서간첩 6장 중 3통이 빠진 것을 확인하고 없어 진 3통의 서간첩 찾기에 주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범 강 모가 별도로 빼돌려 집에 감춰 두었던 것을 수사망이 좁혀지자 불안해 진 부인이 태워 버리려는 순간, 형사대가 급습, 겨우 회수할 수 있었다. 이들은 훔친 난중일기를 갖고 일본으로 밀항하려던 계획을 세웠는데 하루만 수사가 지체되었더라면 그 귀한 국보들이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갈 뻔했다. 참으로 숨 가쁜 순간이었다.

훗날 정석모씨는 그때처럼 긴장된 시간과 싸움을 하기는 처음이었다고 술회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보자에게 격려금을 지급하고 수사에 공을 세운 경찰관은 1계급 특진과 표창을 하기도 했다. 검거된 6명 중 1심에서 류근필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되는 등 모두 1~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도난 방지를 위해 진본과 똑같이 50부를 복사하여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보존케 했다.
/변평섭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이순신난중일기일본유출하루전극적회수 2




 

도정신문님의 다른 기사 보기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도정신문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