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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일제 수탈의 상징 제련소 생태 환경 메카로

격동의 충남 100년 - 장항제련소

2023.09.25(월) 15:57:31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1930년대 장항항과 장항제련소 모습. /충남역사문화연구원

▲ 1930년대 장항항과 장항제련소 모습.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서천군 옛 장항제련소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 서천군 옛 장항제련소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日 1936년 제철소 바위산에 세워 
역, 항구 위치해 금속 수탈 용이 

한때 남한서 가장 큰 산업시설
제련 양 5만 톤 지역발전 이끌어 
주민 건강문제 등 환경오염 불거져
2000억 투입 오염부지 매입 토양정화
인근엔 세계적 수준 국립생태원 조성 


‘장항제련소 굴뚝의 연기가 / 하늘에 나래 편 / 커다란 새 같이만 보였었지…(생략)’   
서천이 고향인 나태주 시인의 ‘막동리 소묘’에 나오는 시구절이다. 나태주 시인은 1979년 이 시로 ‘흙의 문학상’을 수상했었다. 그 시절 장항제련소 높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바람에 떠돌면 나태주 시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바람에 따라 새가 되기도 하고 사자처럼 보이는가 하면 황소의 모양을 연출하는 장항제철소 굴뚝의 연기였다. 해발 56미터의 전망산에 세워진 110미터의 굴뚝. 그러니 장항읍은 물론 서천, 군산, 대천 해수욕장 어디서든 그 굴뚝을 볼 수 있었고 심지어 중국에서도 날씨가 맑은 날은 보인다는 과장된 소문도 있었다.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어선들에게는 등대 역할도 하는 그래서 서해안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었다. 그런데 하마터면 서해안의 명물 장항제련소 굴뚝이 사라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6·25때 북한군이 경상도 지방만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을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던 1950년 9월,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극비리에 이 작전을 수행한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을 속이기 위해 군산·장항과 경상북도 장사리, 강원도 삼척과 함경도 등 몇 곳에 양동작전을 폈다. 군산에서 주변 50Km부근의 모든 도로와 교량은 9월 5일부터 13일 까지 8일 동안 미군 폭격기가 거의 폭파 시켰다. 북한군이 인천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바람에 장항제련소 굴뚝이 늘 표적이 되기도 했으나 다행히 화를 면했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이 수복되자 이번에는 군산에 건설된 공군기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비행기의 이착륙에 장애가 되고 있으니 굴뚝을 철거해 달라는 것이다. 전시인 만큼 군부의 요구가 절대적일 때인데 다행이 여기서도 굴뚝은 살아 남았다.

이처럼 장항 제철소 하면 굴뚝이 연상 되지만 굴뚝 밑의 공장 역사도 깊다. 일본이 장항 제철소를 세운 것은 1936년 식민지 정책이 극도로 팽배할 때였다. 일찌감치 진남포와 함흥에 제철소를 세워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착취하기 시작한 일본은 금·은·철과 같은 금속이 아닌 비철금속 수탈에도 손을 댔다. 그래서 구리·아연·마그네슘의 생산기지를 물색한 끝에 화물선의 접안조건이 좋은 장항을 선택했던 것.

일제수탈의상징제련소생태환경메카로 1


박정희 대통령 때도 바다 수심(水深)등 화물선의 접안조건이 좋은 장항을 인근 군산과 묶어서 국가지정 산업단지로 지정한 바도 있었다. 결국 울산이나 포항 등에 밀려 장항 국가산업단지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지만 계획대로 추진되었더라면 지금쯤 장항은 엄청난 산업단지로 탈 바꿈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설립 당시의 장항제철소 공식 명칭은 조선제련주식회사. 이 때의 직원 수가 1300명이나 되었으니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남한에서는 제일 큰 산업시설이었다. 직원들의 대우도 좋았고 그곳 미혼 남자 직원들은 최고의 신랑감으로 인기가 높았다. 더욱이 해방이 되자 장항 제철소는 포항제철소가 생기기 전까지 남한의 유일한 제철소로  존재감이 컸다. 그래서 5·16 군사혁명 후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군복차림으로 이곳 장항 제철소를 방문한 일도 있다. 그 때 박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제철 한국’의 꿈을 갖고 이곳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처음 장항제철소 굴뚝에 연기가 피어올때는 1500톤의 비금속을 생산했다. 그러던 것이 1974년에는 1만5000톤으로 10배가 늘어 났으며 1976년에는 5만톤 까지 생산량을 늘려 대한민국 산업화의 큰 축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더욱 1989년 6월 럭키그룹(LG그룹)이 장항제철을 인수하고 LS메탈 장항공장으로  출범하면서 시설의 확장과 현대화 등 혁신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렇게 장항 제련소의 역할이 커지고 생산량이 늘어날 수록 어두운 그림자도 커지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나오는 잿더미가 산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잿더미에서 나오는 유해 물질이 환경문제로 번지기 시작한 것. 특히 C급 발암 물질인 비소, 카드륨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결국 정부는 2007년 굴뚝 반경 4㎞의 땅을 2000억원에 매입하여 15년간 환경 관리에 들어 가기로 했다. 뿐 만 아니라 2013년, 인근 서천 마서면 금강로에 국립생태원을 조성했는데 이것이 점차 관광 명소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국립생태원 전경. /국립생태원

▲ 국립생태원 전경. /국립생태원


취소된 국가산업단지 대신에 그리고 심각한 장항의 환경문제를 고려하여 세워진 이곳 국립 생태원은 정말 세계적 수준의 생태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면 세계 5대 기후를 재현하고 있는데 열대우림에는 겨울에도 더운 열대기후를 조성하여 후끈한 열기를 내뿜고, 북극권은 북극권답게… 등등, 한 곳에서 세계 5대 기후를 다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기후권에 생존하는 동식물 1만 6000여종이 숨쉬고 있는데 사막여우, 나일 악어, 코뿔소, 턱수염 도마뱀 등 접하기 어려운 동물과 식물을 볼 수 있다.

장항제철소 굴뚝으로 상징되던 곳이 이제는 세계적 생태 환경의 메카가 되고 있다.
/변평섭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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