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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동학(東學)의 봄

동학이 민주주의에게 묻는다

2022.03.29(화) 22:18:53 | 나드리 (이메일주소:ouujuu@naver.com
               	ouujuu@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봄의 전령사 산수유
▲ 봄의 전령사 산수유

빗물과 3월의 햇살을 머금은 초록의 식물들이 싱그럽다. 살구꽃의 하얀 자태는 바람에 살랑거리면서 달달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산수유 가지에는 겨울이 묻어있고, 삭막한 가지의 마디에는 노란색 군락을 이룬 꽃송이가 물감을 터뜨리듯이 피어나고 있었다. 여행 작가 김훈은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 모양에 현혹된다. 


살구꽃 향기가 달콤하다
▲ 살구꽃 향기가 달콤하다

아직은 때 이른 봄인가 보다. 싸늘한 바람이 지나치면 식물들이 움츠려들고 나무들도 위태로운 잎사귀로 손사래를 치며 바스락거린다. 3월을 춘삼월(春三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음력 3월에 해당하는 것인가 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24절기는,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든 태음력(太陰曆)의 이치에 따른 것이다. 기원전 그리스에서 점성술사가 역(曆)과 계절의 변화를 역학적으로 풀이 했으니 태양력과 비교하는 것은 난해한 문제이기는 하다.


백화산 중턱의 동학농민혁명추모탑 가는 길
▲기념관에서 동학농민혁명추모탑으로 가는 길
 
살구꽃 향기를 따라서 태안초등학교로 향하면 태안의 주산인 백화산이 나온다. 백화산 중턱에 ‘교장바위’ 혹은 ‘교살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있고 그 아래 ‘동학농민혁명추모탑’이 3월의 햇살을 받고 있다.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숙원인 ‘태안동학농민기념관’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조선시대 농민들이 배고픔과 불평등에 맞서 싸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분노와 용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동학농민운동’이라고도 부르는 조선시대 농민들의 궐기는 4.19 혁명으로 그리고 광주민주화 운동과 촛불시위까지 이어지면서 민주주의 이념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원형입구 모습
▲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원형입구 모습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때로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한 말이다. 제퍼슨의 말대로 피를 흘려야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면, 민주주의의 가치는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그렇다면 생명의 가치는 자유와 평등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민주화운동으로 비견(比肩)되는 동학농민운동은 오래전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이루고자 했던 선조들의 의지였기에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


기념관 자료실 입구
▲ 기념관 자료실 입구
 
태안이라는 지명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태평할 泰’와 ‘편안할 安’을 뜻하는 태안(泰安)을 의미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전라북도 고부지역이지만 그 마무리는 충청남도 태안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안지역 사람들의 애국심이 남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130년 전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설파했던 동학의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을 꿈꾸던 우리 민족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학과 민주주의 이념은 친근하게 느껴진다.

기념관에서 바라 본 태안시내 모습
▲ 기념관에서 바라 본 태안시내 모습
 
태안의 동학은 태안 읍내 장현리 최형순(崔亨淳)이 경주로 시제를 지내러 다니면서 최시형으로부터 동학을 배워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태안지역에 동학운동이 활발했던 배경에는 비옥한 농경지와 풍부한 어장, 가끔씩 중국의 난파선이 교류 역할을 하고, 국내·외 장사꾼들의 빈번한 출입에 의한 인적 왕래가 잦았던 것을 그 배경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자료 책자
▲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자료 책자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자료
▲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자료
 
태안의 동학혁명은 조석헌 문장준의 “북접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있다. 이 “북접일기”는 전국의 동학운동 기록 중에서도 매우 귀중한 사료의 하나로 일찍이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기록 등에 의하면 1894년 9월 그믐날 아산 포구를 떠난 동학 혁명군 선단이 원북 방갈리 학암포에 닻을 내리고 이를 기다리던 태안 동학도들이 밤새 소리 없이 걸어서 백화산에 숨어들었다. 이튿날 10월 초하루, 장터에 모여든 성난 동학도들이 옥에 갇힌 30여명의 동학도들을 구출하고 군수 신백희와 순무사 김경제를 비롯한 아속들의 목을 내리쳤다. 태안 관아가 함락되던 날 이웃 서산에서도 군수 박정기와 아전들이 참수되었다.


동학농민군의 당시 활동 모습을 재현했다
▲ 동학농민군의 당시 활동 모습을 재현했다

10월 22일 태안 동학군은 서산을 경유, 해미 귀밀리에 진을 치면서 동학 봉기 가담자가 급격히 불어나자 사기가 충천 되었다. 해미 승전곡 전투 신례원 관작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홍주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 유회군(儒會軍)에게 죽창과 쇠스랑 등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크게 타격을 입고 패하였다. 이때부터 동학군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조선과 일본군은 이들을 반란군으로 몰아서 모두 죽였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이 맞서 싸우는 모습
▲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이 맞서 싸우는 모습
 
계절은 온도를 변화시키면서 자연 생태계의 생명들을 순환시킨다. 순환은 죽음과 탄생의 연속성을 갖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나의 공간에서 시간과 온도의 만남은 진리가 된다. 그리고 진리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멸하기도 한다. 변하지 않는 진리 속에서 인간들의 순환성은 잔인하다. 문명의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주의에서 기인하는 인간의 순환성은 추악한 탐욕을 넘어 멸망으로 귀결된다.


동학농민군의 열악한 무기들이 애처롭다
▲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무기들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무기들
▲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무기들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사상이 신분계급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선비(士), 농부(農夫), 공장(工匠), 상인(商人)의 네 직업의 계급을 말한다. 양반은 노동을 수치로 여겼고, 오로지 노비와 상민 등의 생산 활동과 노역 공여로 사회가 유지되었다. 양반은 군역(軍役)면제는 물론 대부분 면세의 혜택도 누렸다.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 왕조의 부패는 44년 동안 한성판윤(서울시장)이 보름마다 바뀌는 매관매직 이었다. 가렴주구는 백골징포 황구첨정 백지징세, 즉 죽은 사람과 어린애는 물론 빈 땅에도 세금을 물렸다.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었다. 양반들은 사노비의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기념관 자료실 내부 모습
▲ 기념관 자료실 내부 모습

민중이라는 개념은 ‘역사를 창조해왔지만 주인이 되지 못하고 지배층으로부터 억압되어온 사람들’로 보는 시각이 많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는 신분계급을 만들었고, 군주주의(君主主義)에서 민주주의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민중들은 삶의 가치를 선택할 수 없었다. 지배층이 만들어 놓은 신분계급으로 인하여 불평등한 인생을 선택받아야 했던 것이다. 불평등에 맞서 싸운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1894년 조선의 민중들이 민주주의를 꿈꾸었다는 것은, 산수유가 꾸는 꿈과 같다.


돌에 새겨진 동학에 의미가 처연하다
▲ 돌에 새겨진 동학에 의미가 처연하다
 
동학농민혁명의 성지가 된 태안에는 그 당시의 슬픈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염도 없이 곡소리도 없이 남편의 시신을 붙잡고 있어야 했던 최장수 할머니. 현재 추모탑 위에 있는 교장(絞杖)바위에서 무참히 교수형 총살형 타살형으로 바위를 피로 물들이고 골짜기는 시신혈천이 된 동학농민들. 그리고 잔인한 일본군이 근흥 수룡리 토성산에 숨은 일부 동학군을, 소 여물을 써는 작두로 목을 참수한 사건. 태안 읍내에 살고 있던 윤씨 부인이 읍내 개구랑목에서 총살당한 남편의 시신을 머리에 이고 운구하여 하관하고 나서, 순식간에 무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는 “동학군의 아내”라는 실화소설로 쓰여 졌다.


동학농민혁명의 슬픈 이야기를 적은 안내문
▲ 동학농민혁명의 슬픈 이야기를 적은 안내문

2004년 동학혁명 참가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었지만, 동학농민군과 가족들의 응어리는 기념관 바닥의 딱딱한 콘크리트처럼 굳어있다. 동학농민군의 영령들에게 고개 숙여 묵념할 수 있는 ‘태안동학농민기념관’의 원형 하늘은 푸르기만 하다. 그 푸른 하늘아래에 봄이 비릿한 흙냄새를 풍기며 다가오고 있다. 마치 피비린내 같은 민주주의의 봄은 황홀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피를 먹고 자라는 이 민주주의를 어찌하면 좋은가. 비릿한 봄날에, 대책 없는 민주주의와 함께 미래를 걱정한다.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모습
▲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모습


충남 화이팅!! 태안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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