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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님의 침묵을 찾아서 .......

2022.03.29(화) 23:31:36 | 가람과 뫼 (이메일주소:caption563@naver.com
               	caption56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체험관

▲ 체험관

님의침묵을찾아서 1

님의침묵을찾아서 2

님의침묵을찾아서 3


건들면 쨍하고 깨어질듯 높고 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아침 저녁으로는 좀은 쌀쌀한 날씨가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한낮에 부는 포근한 바람에서는 봄내음이 물씬 묻어난다.
모처럼 쾌청한 날씨에 오는 봄을 보고자 길을 나서 홍성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생가를 찾았다.

근대적이고 저항적인 민족시인으로 암울한 시대에 구국의 등불 이셨던 선생님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 학창시절 밤을 새워 읽었던 '만해 평전'을 되뇌이며
사당에 들어서자 마당 한켠 봄의 전령인 매화가 화사한 모습으로 반긴다.
잠시 선생님을 기리는 묵념을 올리고 뒤늦게 찾은 송구스러움을 고했다.

생가

▲ 생가 

님의침묵을찾아서 4

님의침묵을찾아서 5 


1879 년 8월 29일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신 선생님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속명은 유천(裕天) 이다.
선생님의 법명(法名)은 용운(龍雲)이며, 법호(法號)는 만해(萬海) 이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신 선생님께서는 젊어서는 향리에서 아이들을 가르키는 훈장을
하시기도 하셨는데 홍성에서 있었던 동학농민 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신 이후에
구국의 일념을 갖고 활동을 하시기 시작 하였다 한다.

연곡선사를 스승으로 하여 백담사에서 출가하신 선생님 께서는 
'조선불교 유신론' 을 집필 하시고 당시 일제에 부응하는 세력을 척결 하고자 
불교의 혁신 운동을 주도 하셨으며 유심(惟心) 이라는 계몽 잡지를 발간하여
민족의 입과 귀의 역할을 하셨다 한다.

민족시인 시비 공원

▲ 민족시인 시비 공원 

님의침묵을찾아서 6

님의침묵을찾아서 7

님의침묵을찾아서 8

님의침묵을찾아서 9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에 있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기까지
선생님께서는 여러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시며 참여를 할 수 있게끔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으며
불교계의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셨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독립선언식에서
'오늘 우리가 집합 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뭇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 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되어 그 책임이 중하나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시고 만세 삼창을 선창 하셨다 한다.

독립선언식이 끝난후 민족 대표  33인은 일경에게 모두 피체가 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옥중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명쾌한 논리로 주장한
'조선 독립의 서'(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 를 집필 하시어 당시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에게 
제출 하였다 한다.
이 논설은 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에 실려 국내외 독립운동가 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한다.

나즈막한 산자락에 조성된 공원에 올라 시비가 세워진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암울한 시대에 살며 불같은 열정으로 조국의 광복을 노래 하였던 시인들의 이야기가
절절하다.

학창시절 뜻도 헤아리지 못하였지만 즐겨 되뇌이던 싯귀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잊으려면 생각히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끈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 하려요  
 
     - 만해 한용운의 '나는 잊고자' 중에서 -

어록비

▲ 어록비 

님의침묵을찾아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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