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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무령왕릉이 말해주는 "위대한 민족사"

2021.06.09(수) 23:58:34 | 만석꾼 (이메일주소:rlaakstjr69@hanmail.net
               	rlaakstjr6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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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 되는 올해, 국립 공주박물관의 백제시대 유물 다시 보기 3번째인 오늘은 유물 중에 가장 가치가 높은 몇 점을 소개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물이기는 하지만 그 유물이 가지고 있는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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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모든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1점의 네모난 돌판. 그것이 전시되고 있는 1층 전시실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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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돌판이란 백제의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출생과 사망 연대를 정확하게 확인시켜주는 이 묘지석(墓誌石)을 말한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이 돌판 1장으로 그 무덤 안의 모든 유물에 대한 설명이 끝나는 상황. 덕분에 이 묘지석은 당당히 국보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묘지석은 세로 35cm, 가로 41.5cm 크기다. 무령왕릉의 널길 입구에 두장의 묘지석이 놓여 있었는데 삼국시대 무덤 중에서 무덤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재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고분들에서도 없는 게 바로 이 묘지석이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께서 62세 나이가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 을사년(525년) 8월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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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묘지석 뒷면의 간지도(干支圖)이다.

간지도는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 중 쉽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라고 한다. 방위도로 보기도 하고 능역도로 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서쪽을 나타내는 간지들이 비어있어 왕릉과 빈전의 위치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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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왕비의 묘지석이다.

왕비의 묘지석에는 병오년(526년) 11월 백제국왕태비가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서쪽의 땅에서 삼년상을 지내고 나서 기유년(529년) 2월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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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왕비 묘지석 뒷면에 있는 매지권이라는 것인데 “무령왕이 토왕(土王)·토백(土伯)·토부모(土父母) 등에게 문의하여 땅을 샀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신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해 능묘를 삼았기에 문권을 작성해 증거로 한다는 내용으로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장례에 관한 주술적인 풍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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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벽돌로 쌓았다 하여 전축분이라고 부른다. 그 벽돌은 이렇게 글자를 새겨 놓았거나 동전무늬가 있거나 연꽃무늬가 그려진 벽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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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무령왕비 은팔찌다.

두 점 모두 팔찌의 겉표면에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는데, 팔찌의 두께가 고작 1cm 정도밖에 안되지만 용의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용의 머리와 등, 다리, 꼬리, 발과 같은 전체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용의 비늘도 일일이 표현했으며 심지어 발톱도 만들어놨다.

문화재청 사진자료

▲ 문화재청 사진자료


팔찌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 大夫人分 二百?主耳(경자년이월다리작 대부인분 이백삽주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뜻은 “경자년 이월에 다리라는 장인이 은 230 주이(또는 주)를 들여 대부인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경자년이월(庚子年二月)은 서기 520년 2월이다. 왕비가 죽기 6년전에 만든 것으로 무령왕비가 실제 착용했던 장신구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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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령왕릉을 영원토록 밝히던 등잔과 술잔.

무령왕릉에서는 등잔이 총 6점이 출토되었다. 그중 5점은 널방(현실)의 복숭아 모양 등잔으로 사용하였다. 나머지 1점은 널방의 흑유병 주변바닥에서 발견되어 술잔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5점의 등잔 안쪽에는 불을 피웠던 그을음 흔적이 남아 있는데, 분석결과 들기름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중요 유물을 살펴보았는데 역시 크거나 정교한 금은보화 유물 그런 것들보다 묘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묘지석이 역시 후손들에게 소름 돋게 하는 유물이다.
이 묘지석을 대하는 마음은 백제민의 후손으로서 진정 위대한 민족사를 일군 선조들을 경외와 감탄과 존경의 마음으로 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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