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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문정공 팔송 윤황 선생 묘비명으로 본 역사

기호유학의 중심 충남 논산 파평 윤씨 오방파

2021.05.26(수) 09:17:54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논산시 노성면은 파평 윤씨 노종파의 세거지인데요.
파평윤씨 노종파의 노성 입향조인 윤돈(21세)의 아들 윤창세(22세)의 다섯 아들 중 첫째 윤수는 설봉공파, 둘째 윤황은 문정공파, 셋째 윤전은 충헌공파, 넷째 윤흡은 서윤공파, 다섯째 윤희는 전부공파로 노종5방파라 불리는 인물들 중 한 사람 문정공 팔송 윤황(八松 尹煌,1571~1639) 선생의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산 2-1에 있는 묘소와 묘비에 적혀있는 내용을 소개할까 합니다.

문정공팔송윤황선생묘비명으로본역사 1

문정공 팔송 윤황 선생은 인조 때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냈고 탄핵을 받아 유배되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인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사간으로서 극력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환도 후 부제학 전식(全湜)의 탄핵을 받아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 나와 이산으로 돌아와 죽었으며 사후 영의정이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 저서 '팔송봉사(八松封事)'가 있는데 윤황선생재 바로 왼쪽에 이렇게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문정공팔송윤황선생묘비명으로본역사 2

입구에 신도비 같은 규모의 커다란 비가 서 있는데 문정공 팔송 윤황 선생의 묘비로 문정공 팔송 윤황 선생의 일생을 담았는데요.

[윤황(尹煌) 묘비]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37서기 1660년 (현종 1년, 경자)
찬자 - 김상헌(金尙憲)
서자 - 윤순거(尹舜擧)
비신 - 높이- 222㎝, 폭- 104㎝, 두께- 24㎝
자경 - 전액- 7.5㎝, 비문 - 3㎝
석질 - 화강암

한문으로는 이해가 어려운데 마침 한글로 번역을 해 둔 글도 있어 아래에 소개합니다.

[윤황 묘비명] / 논산문화원 발행 금석문대관 인용(전 액)대사간 윤공 묘비명
(비 문)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행 사간원 대사간 윤공 묘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 찬.
가선대부 행 사간원 대사간 겸동지성균관사 김수항 전.

고 대사간 팔송 윤공은 파평인이다. 자질이 강하고 굳세어 큰 절개가 있고,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힘쓰고 독실하게 행하며, 항상 세상을 다스리는 뜻을 품고 수차례 상소를 올려 일을 의논함은 모두 국가의 안위와 존망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끝내 합치하는 바가 없이 일생을 마쳤다.

내가 일찍이 논하건대. 하늘이 인재를 낼 때에는, 세상에 쓸 뜻을 가지고 내지만, 그에 합당한 자가 드물고 부적합한 자가 많다. 혹 처음에는 나갔으나 마침내는 물리침을 당하고 혹 겉으로는 기뻐하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꺼려 하여, 생전에는 당시에 보탬이 되지 않았어도, 죽어서는 후세에 이름이 나는 이가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불초한 무리들이 간악한 생각을 품고 나라를 그르치면서 높은 자리에 앉아 후한 녹봉을 받으며 서로 어깨를 부비며 한 무리가 되어, 어진 자와 충성스러운 자를 항상 멀리하고 친하려 하지 않고, 그들 보기를 원수같이 하니, 오호라! 어찌 하늘의 뜻이 다함인가. 숭정 9년 2월에 공이 재화를 입어 상소를 올렸는데 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하늘의 노여움이 극에 달해, 온 나라 사람들이 황황 급급한데,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 깊이 계셔서 군신들이 감히 만나 보지 못하니 상하가 답답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부터 어찌 이러한 일이 있고서,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잘못된 정치를 이어받은 자가 떳떳한 도리를 지킬 수 없고, 작은 절개에 구애받는 자는 능히 대업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만일 크게 깨달아 행하고 넓고 과감하게 행동하여 구습의 습관을 혁신하지 않으면 난리로 망하는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이 전날에 종묘지락을 정지해 줄 것을 청한 것은 종묘지락의 철회가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반드시 묘악을 말한 것은, 묘악이 철회되면 어선은 반드시 단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요, 어복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요, 내탕과 내수를 얻거나 지출하지 아니하며, 환관과 궁첩을 줄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진상을 가히 파 할 수 있고, 공헌을 가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니 이것들을 이루어 간다면 백가지 불필요한 경비를 덜 수 있어 위태함이 안전하게 전환되는 것이 여기에 있으니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오늘날 생존의 방책을 도모하는 데는 다만 백성을 보존하는 것과 양병에 있는데 제향과 왕을 모시는 일이 하나같이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외부에서 공납하는 것은 폐하고, 저자에서 사서 쓰고 있으니 만일 태관의 관요와 음식, 상방의 직조와 공작을 모두 멈추고 파해서 흙으로 만든 제기와 나물국과 짧은 갈포옷의 크고 훌륭한 덕을 본받고 궁녀와 판방에서 옛 제도를 회복해서 써서 면포를 걷어 들이고 땔나무를 공급받는 비용을 줄이며 그 밖에도 모두 절약해서 검소하게 하고 생략할 수 있는 것을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안으로는 훈척들이 점유한 공전과 산과 못의 이용과 여러 관청의 크고 작은 사사로운 급여의 남용을 탁지부에 맡겨 일괄하고, 밖으로는 각 군영과 각 군에서 횡포로 거둬들이고 낭비하며, 뇌물을 받치는 것들을 차례로 개혁하게 되면 재물의 사용하는 제도도 생기고 백성도 살아날 것입니다.” 하였다. “신이 살펴보니 팔도에서 개간한 밭이 50여만 결인데 탁지부에서 해마다 부과하는 쌀은 14만 석에 불과한데 항상 비용이 거의 3분의 2가 드니 그 나머지로 항상 바치게 하면 반드시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세금 외에 모든 부역을 없앤 후에 한 결의 밭 세금으로 5두미와 한필의 면포를 부과해서 양병의 자금으로 사용한다면 식량의 부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 군사 제도에 있어 수를 줄여 정예를 뽑고 그 장수와 영관을 택하여 그의 의식주를 넉넉하게 해 주고, 기예를 익히게 하고, 상벌을 밝히면 정예 군사 10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군사가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삼월에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추한 오랑캐가 방자하여 악하고 거슬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가혹하나, 이미 갚지 못하고 돌아와서 만일 말을 달콤하게 하지 아니하면, 우리를 우롱함에 반드시 솔개가 날 듯하고 돌이 부딪치듯 하여, 우리를 두렵게 하기를 군사로 할 것입니다. 이때가 이르기 전에 힘을 기르고 스스로 강하게 하면,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그 벌어지는 소란을 들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런즉 오늘날 의리에 항거하는 것은 마침내 빈말이 되고 실로 화에 돌아갈 것입니다. 오늘날, 급한 일은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여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신이 전에 상소하여 말씀드린 것이 이것입니다. 원하오니, 전하께서는 급히 안타깝고 가슴 아픈 마음으로 하교를 내려서, 팔방에서 전하의 원대한 뜻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고 똑똑하게 알게 한 후에, 친히 전방에 나와 국방의 튼튼함을 검토하시고 경계를 펴게 하셔서, 다시는 안일하고, 일시적인 편안함을 꾀하는 일에 흔들리고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 중략 =====

선조임금 이후 20여년은 중국 숭정의 세상을 당하여 현대부가 있었도다. 그는 태사의 후예로 성은 윤씨인데 때가 맑지 못해서 불운을 겪었도다. 몸을 돌아보지 않고, 충성스런 직언을 다하고, 뭇사람은 둥글게 사나, 공은 모가 져서 목숨을 다하는데 이르렀다. 노성의 언덕 선영에 장사하니, 긴긴밤 어두움을 홀로 밝게 빛내리라. 강과 하수가 마르지 않듯, 공의 이름은 영원하리라.

아들 순거 삼가 비문을 필사하다.

(추 기)성부인은 가정 임신 4월 9일에 출생하여 공에게 시집오다. 부인은 예와 법도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성품이 씩씩하고 맑아서, 시어머니 경부인을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경부인이 심히 편안했다. 공이 만년에 벼슬이 높아졌음에도, 경부인은 굳이 녹으로 받은 곡식만 들고, 부인도 오로지 이를 이어 받았으며, 친척이나 귀한 손님과 천한 손님이 많이 찾아와서, 술이나 식사를 차리라고 하여도 일찍이 있고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공이 승지와 부윤이 되었을 때에도 부인은 하나같이 그 직책을 보아 할 일을 봉하였다. 또 이어서 여러 아들들이 승진하니 부인은 더욱 스스로를 겸손히 하고 검소하며, 길쌈과 바느질을 계속하였다. 공의 형제는 다섯이요 자매는 둘이요, 자질들이 심히 많아서 내외손을 모두 모으면, 크고 작은 것이 서로 다른데도, 부인은 모두 은혜와 예로 대하여, 일곱 집이 모두 모여도 원망하거나 불만스런 말이 없었다. 공이 돌아간 후 한 달 만에 장자가 이어서 돌아가니 부인은 거듭되는 상사를 만나 10여년을 하루같이 지냈다. 숭정 무자년에 양자 간 아들 순거가 안음 현감이 되었는데 9월 29일에 부인이 임지 관사에서 돌아가서, 장례를 모시려고 공의 묘를 열어보니 물이 차 있어 걱정이었다. 드디어 운구하여 12월 3일에 노성 서쪽 장구리에 공과 합장하니, 선부군 묘와는 3리가 떨어져 있고, 장자 운거의 묘는 가까이 앞에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집안이 흥하려면 반드시 어진 부인이 있어 남편을 보좌하고 자손을 가르치고 엄하게 해서 모범을 보이고, 이어 그 고을이 교화를 받고, 세상의 도리가 힘입은 바 되니, 이것이 어찌 가운데만 관계된다 하겠는가. 조정에 나간 여러 아들들이 왕의 훈계를 잘 받들고, 행실이 아름다워 모든 신하들의 모범이 되었다. 선조 초에 문거는 대사헌이 되었고, 선거는 국자감 교수로 승진하여 한때의 영광이 되었다. 그 손자, 증손이 모두 문장과 행실이 좋았으니, 이는 공에게서 나왔으나, 어찌 부인의 가르침과 돌봄이 아니겠는가. 청음 문정공께서 이미 공의 사적은 묘비에 기록했기에, 부인의 행적을 대략 모아서 비문 뒤에 추기로 세운다. 이 비를 세운 이는 실은 둘째 아들 상거가, 그 때 백천 군수이었다.
숭정 경자 4월 일.
아들 문거 삼가 쓰다.

(추 기)지난 기묘년 겨울에 순거 등이 선고의 묘지명을 청음 김문정공에게 부탁하여 글을 짓고, 경진년에 석판을 구해 새겨, 묘전의 돌 밑에 묻고, 신묘년 봄에 다시 공에게 비문을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조석으로 해그림자를 보면서 이미 현석에 기술했는데, 이제 내가 병이 있어 부탁받은 비문 초안을 맡을 수가 없다.’하였다. ‘또한 내가 외가의 일에 한편으로는 생존 시와 돌아간 후에 두 번 쓰는 것이라.’하더니, 비문을 쓰고서 얼마 후에 공이 돌아갔다. 이제 돌을 다듬어 이 글을 그대로 쓰는 것은 공의 가르침을 따름이라. 선고의 벼슬은 통정에 그쳤으나 남한산성에서 호종한 것으로 해서, 포상으로 가선대부의 계직을 더하고, 비답을 내렸으나 묘소에 이르러서는 걸림이 있어, 모지와 묘표에 모두 이것을 쓸 수 없었다. 여럿이 의논하기를 품격에 맞춰 비를 세운다면 이품의 관직을 쓰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제행직에 높은 것을 더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실은 원문에 등재하지 아니하고 또 우암에게 청하여 후기를 하였는데, 이 모든 전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자손과 증손도 미쳐 기록하지 않은 것이 있어, 삼가 다시 비의 양측에 갖추어 기록하였다. 운거는 관찰사 최 기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변을 두니 정언이고, 재취하니 경력인 이장형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헌을 두니 생원이요, 두 딸은 이상기와 박상경에게 출가하고, 첩의 딸은 이 부에게 출가하였다. 순거는 군수니 관찰사 이춘원의 따님을 취하여 두 아들을 두니, 검열인 석과 생원인 진을 두었다. 상거는 찰방 이경배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파와 세 딸을 두니, 사위는 김창석, 이경만은 생원이요, 최재웅이다. 재취는 안 진의 따님인데 아들 자와 딸 하는 어리다. 문거는 이 연의 따님을 취하여 박, 윤 두 아들을 두고, 다섯 따님을 두니 사위는 이순악, 최세경, 생원인 이 옹, 심해이고 막내는 미혼이다. 성거는 나이 17세에 장가들기 전에 죽었다. 선거는 생원 이장백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 증과 추를 두고, 딸 하나는 박세후에게 출가하였다. 첩의 아들은 발과 졸이요, 이정여는 일찍 죽고, 양자로 교리 민적이 있다. 권 준은 군수인데 3남 공, 정, 등을 두고, 네 딸을 두니 사위는 최전우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경거는 참판 신 감의 따님을 취하여 2남 근, 간을 두고, 네 딸을 두니 어리다. 시거는 진사인데 판서 민성휘의 따님을 취하나 자녀가 없고, 재취하니 현령 이영의의 따님을 얻어 3남 강, 건, 충을 두고, 삼녀를 두니 사위는 김수칭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최노첨은 1녀를 두니 사위는 이구송인데 생원이다. 변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경교, 성교는 모두 진사요, 명교이고, 사위는 이 관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헌은 아들 정교와 두 딸을 두었다. 석은 3남 1녀를 두니, 도교, 덕교, 지교이고 사위는 권재형이다. 진은 딸 하나를 두고, 파도 딸 하나요, 박은 아들 은교와 두 딸을 두고, 윤은 딸 하나를 두고, 증은 두 딸을 두고, 추는 두 아들 자교, 가교를 두고, 경교는 1남 1녀를 두고, 성교는 두 딸을 두니 모두 어리다.

비석을 둘러 쓰여있는 한문을 해석한 것인데요.
길어도 너무 길죠? 그래서 중략을 했는데요.
한 사람의 일생을 피력하려니 내용도 길어지지만 이렇게 많은 내용을 담으려다 보니 비석도 커지게 되었겠죠? ^^

문정공팔송윤황선생묘비명으로본역사 3

이곳 윤황선생 묘역에는 모두 5단으로 구분되어 묘가 있는데요.
위로부터 네번째 열에 있는 묘소는 조선말 문신으로 장성부사, 돈녕부도정을 지낸 尹東魯[윤동로 1663년(현종 4) ~ 1741년(영조 17)]의 자는 사술(士述). 호는 연애(燕崖)이며 유년시절에는 종조부인 명재 윤증에게 수학하였으며 아버지는 부제학 윤경교(尹敬敎)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 목사 한수원(韓壽遠)의 딸입니다.
1732년 돈녕부도정에 제수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시·제문·사(辭)·유사 등을 수록한 시문집 都正公遺稿(도정공유고 2권 1책)를 남겼으며 권1에는 사(辭) 1편, 시 300여 수, 제문 8편, 권2에는 가장·묘지 각 1편이 부록에는 연보·유사·묘표·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권말에는 그의 큰아들인 응교(應敎) 광운(光運)의 유소(遺疏) 8편과 그에 대한 가장·제문·만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문정공팔송윤황선생묘비명으로본역사 4

그 위의 세번째 열에는 3기의 묘소가 나란히 있는데 묘표에는 두명의 부인 묘가 있습니다.

묘표에 高山縣監 贈左承旨 坡平尹公 勛擧之墓 贈淑夫人首陽崔氏부右 贈淑夫人全州李氏부-합사할-左(고산현감 증좌승지 파평윤공 훈거지묘 증숙부인수양최씨부우 증숙부인전주이씨부좌)라고 되어 있는데 문정공 팔송 윤황 선생의 첫째 아들입니다.
묘비명은 아우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겸 지춘추관사(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春秋館事) 문거(文擧)는 찬(撰) 하였답니다.
처음 소개한 윤훈거의 묘 바로 아래 윤동로는 윤훈거의 손자입니다.

문정공팔송윤황선생묘비명으로본역사 5

뭔가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이 묘소가 바로 문정공 팔송 윤황 선생의 묘입니다.

대표사진부탁드립니다.

1992년 10월 28일 논산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묘 앞에 세워진 묘표에는 大司諫坡平尹公諱煌之墓 貞夫人昌寧成氏부-합사할-左(대사간 파령윤공 휘 황지묘 정부인 창녕성씨 부좌)라 새겨져 있고, "훈거는 현감이요. 두 아들은 변과 헌이요. 두 딸 사위는 이상기.박상경이다. 순거의 세 아들은 철.진.기이요, 순거는 세마니 아들은 파이요, 세 딸 사위는 김석창.이경만.최재옹이요, 문거는 승지이니, 두 아들은 박.륜이요, 다섯 딸은 이순악.최세경.이옹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선거는 사부니 두 아들은 증과 추요 딸은 박세후에게 출가하였다. 이정여는 생원이니 계자는 민적이다. 권준은 좌랑이니 세 아들은 서.지.민이요, 5녀를 두니, 박선.성수동이 사위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민거는 진사이니 3남 5녀를 두었고, 경거는 생원이니, 2남 2녀를 두었고, 시거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최씨는 일녀를 두었다. 변은 3남 2녀를 두고, 경교.성교와 나머지는 어리다."라고 한문으로 쓰여있습니다. ^^

문정공팔송윤황선생묘비명으로본역사 6

그리고 묘소의 오른쪽에는 새롭게 새긴 듯한 모습의 묘비가 서 있는데 내용을 살펴 볼까요?
네~~~ 스크롤 압박에 몸살 나겠다구요? ㅎㅎㅎ

문정공팔송윤황선생묘비명으로본역사 7

[윤황 묘표] / 논산문화원 금석문대관에서 인용大司諫坡平尹公諱煌之墓 貞夫人昌寧成氏부左(대사간 파령윤공 휘 황지묘 정부인 창녕성씨 부좌)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윤공 묘표 음기 숭정기원 무진년 후 23년 신묘년에 아들 순거 삼가 쓰다.

"나라에 서쪽의 난리가 시작 되고 부터 실행은 정묘년에 이루어지고, 맹약은 정축년에 받았는데, 그 당시에 대의에 항거하고 정론을 가지고 시종 불가하다고 말한 사람은 팔송 윤공 그 사람이다. 정묘년에 공이 사간으로 있으면서 화친을 맺을 수 있는 명목이 있지 않으면 화친은 실은 항복이고 극열하게 말해서, 임금이 삭직을 명하고 귀양을 보내게 되었는데, 변론한 이들의 힘을 입어 그만두게 되었다. 병자년에 공이 대사간이 되어 다시 크게 경계하고 깨우쳐 일으키는 방법을 극진히 말하기를 행궁을 불사르고 진격해서 반드시 싸울 것을 나타내는 마음의 글을 5-6차례 올렸으나 마침내 받아주지 아니하였다."로 시작되는데 다 올리면 돌 맞을 듯 하여 중략하고 마지막 글을 올리면 "부인 창녕 성씨의 할아버지는 수침이니 청송선생이요 아버지는 혼이니 우계선생이다. 예법 속에서 낳고 자라서, 가르침이 성품으로 이루어져서 맑고 삼가하고 공경하고 경외하여 군자의 배필이 되었다. 임신년 4월 9일에 낳아 무자년 9월 그믐날에 그에 아들 순거의 근무지인 안음에서 돌아갔다. 5남 2녀를 두니 장남은 운거요, 다음은 순거.상거.문거.선거요 사위는 이정여.권준이요 측실에서 삼남을 두니 민거.경거.시거요, 딸은 하나로 사위는 최노첨이다. 첩과 내.외 제손이 칠십여인이니 아아! 성하도다. 장사를 지낸 뒤에 여러 자손들이 울면서 나에게 묘표를 지어 줄 것을 부탁하니, 나 계는 실로 여러 자손들과 형제의 의가 있고, 지난날 공이 귀양 갔을 때에 나도 또한 당적에 함께 하여 평생토록 사모하고 우러러 보니, 공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였다. 오호라.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삼가 그 만분의 일을 기록해서 그 비음에 쓰노라."
통훈대부 행 홍문과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 춘추관 기주관 유계는 찬하다.라 적혀 있답니다.
^^

문정공팔송윤황선생묘비명으로본역사 8

그리고 팔송 윤황 선생의 묘소 뒤에는 또 하나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데요.

문정공팔송윤황선생묘비명으로본역사 9

묘소의 오른쪽에 있는 묘비는 화강암 비신에 지붕돌(가첨석)을 얹었고 농대석에 세워져 있는 비의 앞면에는 副提學長湖尹公諱敬敎墓 貞夫人淸州韓氏부左(부제학장호윤공휘경교묘 정부인 청주한씨부좌)라고 적혀있는 비석을 보니 묘의 주인이 조선 중기의 문인인 윤경교(尹敬敎, 1632~1691)이며 자는 양일(養一), 호는 장호(長湖)인데요.

윤경교는 윤황(尹煌)의 증손이며 윤훈거의 손자로 아버지는 윤변(尹O)이며 어머니는 조직(趙O)의 딸로 윤선거(尹宣擧)에게서 수학하고 1657년(효종 8) 진사시에 합격, 1663년(현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조 할아버지 묘 위에 자리잡게 되었을까요???
가능하다면 그 이유를 찾아서 다음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논산윤황선생재실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명재로287번길 96 윤황선생묘소 : 충청남도 논산시 장마루로716번길 145 윤황선생고택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유봉영당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노성로248번길 52 종학당 : 충청남도 논산시 종학길 39
논산윤황선생재실과 묘소 주변에는 파평윤씨 노종파 문중학교였던 종학당 그리고 명재 윤중 선생의 영정이 있는 유봉영당 재실인 병사와 파평 윤씨 노종파 오방파의 아버지인 윤창세와 처가의 묘소가 있는 윤창세묘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모두 충분한 주차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으니 비대면으로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탐방하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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