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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공주 숭의사에서 항일 투쟁 애국지사를 만나다

조선을 침탈한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성암 이철영 선생

2021.05.01(토) 13:58:55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정리되지 못한 역사 때문에 사회가 분열되고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데요.
우연히 초려 이유태 선생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가 공주에 숭의사라는 곳에 항일투쟁을 한 애국지사 성암 이철영 선생이 봉향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방문하였습니다.

공주숭의사에서항일투쟁애국지사를만나다 1

숭의사는 충남 공주시 상왕동 331-3에 독립투사 성암(醒菴) 이철영(李喆榮 1867~1919)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우인데요.
숭의사로 오르는 경사길 입구에는 사당을 관리하는 구인당(求仁堂)이 자리하고 있으며 성암 이철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구 선생이 살고 있습니다.

공주숭의사에서항일투쟁애국지사를만나다 2

숭의사 오른쪽에는 오석으로 각인하여 세운 醒菴先生崇義祠廟庭碑(성암선생숭의사묘정비)가 세워져 있는데 지면 관계상 이번에는 醒菴先生墓碣銘幷序(성암선생묘갈명병서)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하겠습니다.

공주숭의사에서항일투쟁애국지사를만나다 3

숭의사는 초려 이유태 선생의 9세손이었던 이철영의 항일 행적과 덕행을 기리고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사우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양식 삼문이 있습니다.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는데 1968년 3월, 당시 공주향교의 전교 정인상 등 공주 유림 51명이 각 향교와 서원에 이철영의 덕행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사우를 세우자는 통문을 돌리면서 발의되었으며, 전국의 18개 향교, 서원, 사우가 사우 건립에 찬성하는 답신을 보내왔고, 국비와 도비, 그리고 뜻있는 후손들의 의연금을 모아 1971년 사우를 신축하였으며, 1981년 ‘숭의사보존사업회’가 발족해 1983년 사우의 아래쪽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구인당(求仁堂)을 건립하였답니다.

공주숭의사에서항일투쟁애국지사를만나다 4

숭의사에 모셔진 이철영 선생은 1867년 3월 17일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상왕리에서 아버지는 이홍제(李弘濟)와 어머니는 상산박씨(商山朴氏)로 통덕랑(通德郞) 박용원(朴龍遠)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형(季衡), 호는 성암(醒菴)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인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의 9대손입니다.

공주숭의사에서항일투쟁애국지사를만나다 5

유대원(柳大源)의 문인이 되어 한학을 공부했고, 1904년 일본인들이 철도 공사를 하던 중 공주에 있는 선영을 침범하자 유림의 진정서(陳情書)를 갖고 관계자를 찾아가 항의해 철도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했고, 1905년에는 초려 이유태(李惟泰)의 사서답문(四書答問)을 교정, 발간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기의려문(起義旅文)’이라는 항의문을 지어 조정과 일본에 보내 항의했는데 기의려문에서 “을사늑약은 법적 형식이 결여된 불법적인 조약으로 을사 적이 여기에 찬성하여 맺어진 것으로, 백성들의 의사와는 상반되는 것이며, 합법성을 의미하는 조약이 아닌 늑약인데다 불법과 강제성을 띠었으니 무효”라고 주장하고 일본 정부에 치일국정부서(致日國政府書)를 보내 "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일본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고 밝혔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수차에 걸쳐 일경의 취조를 받았으나 그때마다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기에 19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아야 했고, 한번은 일제가 추진하는 민적에 등록하길 거부해 69일간 구금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빈번히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그는 결국 1919년 12월 6일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53세에 사망했습니다.

공주(公州)의 숭의사(崇義祠)에 봉향되었고, 저서로는 '성암집(醒菴集)' 4책과 한글 '내범요람(內範要覽)' 1책이 있으며 상훈과 추모는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철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출처 - 나무위키 백과사전. 네이버)

공주숭의사에서항일투쟁애국지사를만나다 6

이날 연로한 성암 선생의 손자이며 숭의사를 지키는 이종구 선생이 굳이 위험한 경사로를 올라와서 친히 이러저러한 설명들을 해 주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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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사당과는 달리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숭의사에서 성암 이철영 선생의 묘소가 어딘지 물으니, 이종구 선생께서 직접 안내하여 동행하니 용문서원의 입구에서 북쪽으로 마주 보는 곳 급경사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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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산71-2(도로명 창벽로 274)에서 남동 방향. 위 사진의 전봇대 옆으로 난 시멘트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서면 용문서원과 숭의사가 나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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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선생의 묘소 아래에는 이렇게 전부 한자로 기록한 묘갈명이 특이하게도 따로 떨어져 세워져 있었으며, 성암선생묘갈명병서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醒菴先生墓碣銘幷序의 원문을 올렸더니 한자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로 나와 부득이하게 해설을 올리게 되었으나 혹여 원문이 필요한 분은 연락을 주시면 드리겠습니다.

"성암이선생 묘갈명 병서 驛 선선유교경전연구소 고주환 대표오호라, 큰 기운을 모아 뭉쳤으니 타고난 산악의 자품이요 충만한 천지의 기운이로다. 참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 하여 올바른 길을 천명하셨으니, 인의와 충신은 인식의 본분이요 총칼의 위협에도 행하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다. 이로써 세상의 도를 부추기고 이로써 인륜의 기강을 수립한 자가 고금에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 성암 선생 같은 분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선생이 세우신 업적을 말하지 않는 이가 없으되 학문의 정맥과 진리를 함양하고 조용히 실천하여 가학을 계승하고 율곡(석담)에 연원하여 정주의 도학에 이른 데 대해서는 아는 자가 더욱 드무니, 아, 덕을 실천함이 어려운 일이고 덕을 알기 쉽지 않음인가?"

다음은 후학 종손 이종낙님께서 스신 이철영 선생에 대한 글입니다.

선생의 휘는 철영이요 자는 계형이며 처음 휘는 은영이었으며 성암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신라 원훈이신 휘 알평이 시조이고, 고려시대 대제학 검교정승을 지낸 휘 세기는 호가 송암이고, 휘 천은 대제학 월성부원군으로 호는 국당이며 시호는 문효이다. 휘 성중은 조선개국원종공신 검교좌정승 시호가 정순이고, 휘 휴는 판한성부사이며, 이를 이어 벼슬이 대대로 이어졌다. 휘 유태라는 분은 실로 문헌공 초려선생이니 기록할 필요도 없다. 고조 휘 광중은 효행으로 도의 천거를 받았고, 증조 휘 재원은 호가 호은이니 학문에 연원이 있고 재주는 경제를 겸했다 하여 도의 천거를 받았고, 조 휘 건은 백씨 휘 횡의 아들 휘 홍제를 양자하였으니, 바로 선생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상산 박씨 통덕랑 용원의 따님이다. 조는 참판 희현이다. 고종 정묘년(1867) 3월 17일에 공주 중동의 옛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태어남에 자질이 특출하여 어엿한 장자의 기상이 있으니, 보는 자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다. 선생의 백씨가 종가에 입후했는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병에 걸렸다. 선친이 고향 땅이 불리하다 하여 집안을 정리하여 연산으로 이사했다가 병자년에 돌아가시니 객지에서 망창한 지라 상중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또 종가 형님 상을 당하니 종손과 지손 중에 남자는 오직 선생 한 분 뿐이었다. 문중에서 의논하여 호은공의 종증손인 용호공 휘 회영을 종가의 차자로 계통을 이으니 선생에게는 종형이다. 용호공이 종가의 일을 담당하고 선생으로 하여금 선생님을 따라가 유학하게 하였다. 마침 겸와 처사 유공 대원이 부여 당리에 은거하며 강학하거늘, 선생이 그 집에 장가들고 오가며 수업할 적에 매양 집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여 자잘한 일로 봉양함에 수업에 전념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무자년에 조비 안유인 상을 당하고 다음 해에 연속하여 어머니인 박유인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마치고 겸와를 따라 당리에 이주하여 날마다 학문의 깊은 경지에 차츰차츰 들어가고 처남인 경운, 병위와 학문과 덕을 연마하여 덕행과 문망이 향방의 지표가 되었다.

앞서 국가가 여러 차례 당고를 겪고 이어서 외척이 정권을 잡아 유와 속이 구분이 없어지니 내홍과 외우는 한 터럭에 천균의 무게가 매달린 형세였다. 선생이 더욱 더 은둔하여 심신을 단속하여 모든 관록과 명예를 못 본 듯이 하고 사람이 혹 과거 볼 것을 권하는 이가 있으면 문득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금일 국운의 위태함이 실로 선비의 기풍이 퇴화되어 내수와 외양의 실책에 말미암은 것이거늘,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한갓 이록만을 탐하여 남의 집 일보듯이 하고 구제할 줄 모르니, 이 어찌 지사와 仁人이 일할 수 있는 때인가?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찌할 수 없거든 두문불출하고 독서하여 스스로 제 몸을 지킴이 옳다.’하였다.

갑진년(1904)에 왜가 철로를 부설할 적에, 그 선이 문헌공의 묘역을 침범하거늘, 선생이 두루 조정의 여러 대신을 만나서 통렬하고 절실하게 항의하여 일이 마침내 해결되었다.

을사년(1905)에 왜가 강제로 조약을 맺거늘 선생이 의려문을 지어 의리를 들어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형세가 여의치 못했다. 이후 오랑캐의 교육이 더욱 치성하여 각처의 향교와 서원에 신학을 설치함에 사람이 바람에 쏠리듯이 다투어 나아가거늘 선생이 개탄하여 말하였다. “중국이 망함에 우리의 도가 동방에 있거늘 지금 또 이와 같으니 해가 홍수와 맹수보다 심하다. 명색이 유학을 한다는 자가 어찌 구제하는 한 마디 말도 없겠는가?” ‘당우 3대의 도와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학문은 우리 동방의 종교이니,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곧 오랑캐와 금수일 뿐이다. 춘추의 의리는 존화양이가 큼이 되니, 어찌 이 오랑캐의 교육을 성인의 문에 들일 수 있는가?’라고 운운한 것은 부여 향교에 보낸 글이요, ‘저 왜구가 맹세코 이 하늘을 함께할 수 없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거늘, 지금 도리어 그들이 하는 짓을 본받아 선생의 영혼이 오르내리는 뜰을 더럽힌다.’라고 운운한 것은 돈암서원에 보낸 글이다. 또 면암 최익현, 운강 이강년, 재상 조병세, 판서 민영환, 안중근, 이준 등 여러분의 의를 들어 순절한 것에 대하여 각각 시로써 그 일을 말하고 그 뜻을 보이니 내용을 아는 자가 정확한 의론임을 알았다.

앞서 왜가 속임수를 써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칭하며 국호를 대한이라 고치고 거짓으로 고종을 광무황제라 높이며 다시 강제로 융희황제에게 선위케 하여 모든 정치 명령을 황칙이라 칭탁하여 자행하니, 당시에 사대부들 모두가 황제의 높임을 영예로 여겨 다투어 앞장서거늘, 선생이 ‘조맹이 귀하게 해준 것을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으니 사람이 귀하게 해준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니, 조맹이 귀하게 해준 것은 조맹이 능히 천하게 한다. 지금 거짓 높임이 장차 후일의 축출의 조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산양공과 안락공의 칭호를 못할 짓이 없으리니, 내가 이를 어찌할꼬? 단지 마땅히 나의 의를 행하여 옛 법을 따름이 옳다.’고 하였다.

기유년(1909)에 왜가 민적에 편입시키거늘, 선생이 의리로 호적에 편입하여 삶을 도모할 수 없다 하여 글을 써서 일본 정부에 보내 신복이 되지 않겠다는 의리를 보이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갑신년(1884)에 죽첨진일이 우리 임금을 협박하여 옮기고 우리 재상을 살육했으며, 갑오년(1894)에 대도규개가 우리 궁궐을 노략질하고 우리 전장문물을 파괴했으며, 을미년(1895)에 삼포오루가 우리 국모를 시해했고, 을사년(1905)에 박문, 권조, 호도 등이 군대를 인솔하여 궁궐에 들어가 강제로 5조약을 체결하고 정부를 협박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국가 세금과 벼슬·포상·형법 등을 제멋대로 하고 궁궐을 파괴하며 우리 도성을 헐며 우리 군대를 해산하고 우리를 신첩과 노예로 삼고자 했으며, 기타 인의를 꽉 틀어막아 윤리를 파괴하고 충량한 士民을 구속하여 국가의 원기를 다 끊어놓고 난적을 유인하여 앞잡이로 삼고 어리석은 사람을 모집하여 멕시코에 팔고 광산을 개발하고 항로를 개설하여 국가의 재원을 강탈하고 돈과 화폐를 환롱하여 백성의 고혈을 고갈시켰으니, 전후 이런 종류의 포학을 이루 다 손꼽을 수 없다. 이는 전일의 서약을 따르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고 장차 인종을 바꾸려는 악독한 계책을 행하여 우리 국민을 한 사람도 살아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악을 쌓으면 반드시 죽게 되고 지나치게 강하면 반드시 부러짐은 이치의 자연이니, 지금 우리의 국운이 비록 비색하다고 하나 마침내 천리가 안정되어 인위적인 악을 이긴다면 어찌 오늘날 일본의 패망이 임진왜란의 참혹함을 따르지 않겠는가? 이쯤에서 그래도 그칠 수 있는 때에 이미 벌어진 춤판이라 말하지 말고 전자의 잘못을 말끔히 고치어 양국이 각기 자국의 정치를 닦아 영원히 서로 편안할 수 있다면 이상 없는 다행이겠다.”

글을 부여읍 주재소에 보내니, 얼마 안 되어 왜 장졸 6-7명이 와서 체포하여 하룻밤을 가두고 이튿날 홍산경찰서로 압송하였다. 두목 왜가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선생이 대답하였다. “너희 나라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 감히 조선의 보호를 선언하고서 실상 흉악한 행동이 끝이 없음은 무엇 때문이냐?” 왜가 말하였다. “한국이 일본 개화의 힘이 없었다면 이미 러시아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개화 이전에는 윤리가 밝고 교화가 행하여 500년을 이어왔는데, 개화 이후에 불과 수십 년에 이 지경으로 무너졌으니, 나라를 망치고 사람의 도리를 말살하는 것은 너의 이른바 개화이다. 또 개화의 근원이 실상 서양에서 나왔거늘 너희 나라가 영국에서 개화를 받아들일 적에 영국이 일본 정부를 강탈했느냐, 군대를 해산했느냐, 도성을 헐었느냐, 너의 임금을 겁박하여 옮겼느냐, 너의 왕비를 시해했느냐? 영국이 이런 일을 너희 나라에 행하지 않았거늘 너희는 어째서 조선에 행하느냐? 너희는 단지 중화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개화의 죄인이다.” 왜가 말하였다. “시세 형편에 따라서 재단하여 처리한 것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임금을 시해하여 개화하고 아비를 죽이고 즉위한 것 또한 시세 형편에 따르는 도인가?” 왜가 성내며 칼을 뽑아 위협하거늘 선생이 말하였다. “내가 말한 것은 만고의 대의요 네가 믿는 것은 한 조각 칼날이니, 너는 내 몸을 살해하는 데 불과할 것이다. 어찌 나의 의를 빼앗을 수 있겠는가?” 왜가 또 설문하였다. “이웃 마을에 화재가 나면 가서 구제하는가?” “가서 구제한다.” 왜가 말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대한의 화재를 구제하기 위해 왔거늘 공은 어째서 원수로 대하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는 화재를 구제하는 자가 아니라 방화자이다. 가령 너희 말대로라도 화재를 구제하여 불이 꺼지면 떠나야 할 것이거늘, 이에 머물면서 암암리에 불난 집 재산을 강탈하려 함은 무엇 때문이냐? 너희들은 속히 철수하여 돌아가라. 나는 우리 식구와 함께 살림살이를 하겠다.” 얼마 안 있어 부여주재소 왜가 다시 선생을 끌고 가 강제로 호적을 편입하게 하거늘, 선생이 꾸짖으며 말하였다. “내 차라리 죽어 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일본의 백성이 되고 싶지 않노라.” 왜가 ‘내가 비록 일본 사람이지만 한국의 관리가 되어 이 지방을 책임졌으니 너는 지역민이니 정부의 명령을 어찌 감히 거부하는가?’하고 큰 몽둥이로 매우 심하게 구타하고 쫓아냈다. 이어서 또 홍산 경찰서에 잡혀갔다.

선생이 두 편의 글을 썼으니, 하나는 재차 일본정부에 보내는 것이요, 하나는 경찰서장에게 보내어 고금의 역순의 이치와 피차간에 편안함과 위태함의 방도로써 깨우쳤다. 경찰서에 이르니 여러 왜경이 법조문을 보여주면서 갖가지 방도로 달래고 협박하거늘 선생이 말하였다. “죽이려거든 즉시 죽일 뿐이지 무슨 힐난이 이 지경인가?” 왜가 말하였다. “죄값을 바치면 형벌을 면할 수 있다.” 선생이 말하였다. “나는 우리 왕의 신민이니 죽일 수는 있어도 형벌을 쓸 수는 없다.” 왜가 심히 성내어 의관을 벗기려 하거늘 선생이 크게 꾸짖으면서 “군자는 죽어도 관을 벗지 않나니 너는 큰 칼로 찍으면 머리를 베고 허리를 끊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사십이 넘어 더디게 문을 나서니, 온전히 돌아갈 것을 기약하여 반걸음조차도 조심하였네. 종사와 백성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몸과 뼈가 가루가 된들 의를 어찌 사양할까?
왜는 마침내 억지로 의관을 벗기지 못하고, 어지럽게 구타하면서 축출하였다.

경술년(1910) 가을에 왜가 강제로 합방조약을 체결하고 양여했다는 말로 국중에 포고하여 황실을 이왕가라 하고 각 군에 주재하는 왜로 하여금 합방의 가부를 우리 국민에게 물어 만일 불가하다 하면 마땅히 혹독한 재앙이 있을 것이다 운운하니, 아, 선생이 양존(거짓으로 높임)이라고 예언한 것이 약속한 증서와 같이 일치하였다. 저 황제라고 높임을 주장한 자들이 장차 부끄러워 땀 흘릴 겨를조차 없으리라.

이윽고 왜 헌병이 와서 물었다. “합방한 사실을 들었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이런 말은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 왜가 더 이상 힐난하지 않고 가더니, 몇 일 뒤 왜병이 와서, ‘일본 대대장이 어제 본군에 도착하여 공의 고명함을 듣고 우리들로 하여금 데려오라 했다.’하거늘, 선생이 말하였다. “강약이 같지 않으니 너희가 체포해 갈 수는 있어도 만일 말로 부르면 비록 너희 임금이 불러도 의리상 갈 수 없다.” 왜병이 심히 급하게 잡아갔다.

이때 경운과 함께 체포되어 부여읍에 들어가 군청의 전정(임금의 어진을 모신 곳)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자, 왜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곡하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이곳은 곧 우리 500년 종사가 있던 곳인데 지금 우리나라가 너희들의 손에 전복된지라, 그래서 곡하노라.”왜가 연설 상을 설치하고 군민 수백 명을 불러 모아 놓고 강제로 선생을 당에 오르게 하거늘, 선생이 ‘전패를 받든 곳에 의리상 감히 오르지 못한다.’하자 여러 명의 왜가 붙잡아 올려놓고 이른바 연설이라는 것이 우리를 달래고 협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선생이 귀를 가리고 앉으니 왜가 성내어 칼로 베려하거늘 선생이 목을 들이대니 왜가 도리어 물러나면서 말하였다. “완고한 유생이 나라를 위해 통곡하는 것을 내가 그르다 할 수 없으나 단지 지금 합방은 조선이 가난하여 자치할 능력이 없어 누차 양여했기 때문에 부득이 받은 것이거늘 너희들이 도리어 우리를 원수로 여김은 무엇 때문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강화도조약(1876) 초부터 우리의 반역자를 불러들여 금일 너희 계획을 달성하고 감히 양여설로 우리 백성을 속이고 천하의 이목을 가리고자 하는가? 내가 비록 만 번 죽어도 지키는 바는 변하지 않는다.” 왜가 백이와 숙제가 망국 후에 고사리를 뜯어먹다 굶어죽었다는 글을 써서 보여주고 집으로 보냈다. 이후로 왜의 염탐이 더욱 빈번히 하여 모든 계책을 다 썼지만 끝내 거절하고 모든 일에 저들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일절 하지 않았다.

이때 왜는 국민으로 하여금 각기 산과 밭을 측량하게 하면서 하지 않으면 국유로 소속시키겠다고 운운하거늘 선생이 종씨와 의논하면서 말하였다. “사가의 좋은 일과 궂은일을 마땅히 국가와 함께 해야 할 것이니, 원수 오랑캐에게 구걸함은 차마 못할 짓이다.” 심지어 차와 우편마저도 절대로 이용하지 않았고 일찍이 철도시를 지은 데에 ‘남은 이용해도 나는 이용하지 않으니 괵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다른 길이 아니다.’는 구절이 있다. 한 선비가 선대의 충의로써 서원을 세워 향사를 올리고자 선생에게 문의하거늘, 선생이 춘추의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장례를 쓰지 않는다.’는 의리를 들어 제지하였다.

갑인년(1914) 가을에 또 부여읍에 체포되었다. 분대장이 말하였다. “일본을 배척하는 뜻을 지녔다는 말을 듣고 누차 만나려 해도 한결같이 완고하게 거절하고 민적은 국가의 큰 정사거늘 끝내 신고하지 않으니, 이는 무슨 행위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과 존화양이일 뿐이다.” 왜가 칼을 내밀면서 “지금 온 국민이 순종하지 않는 이가 없거늘 너는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이같이 어긋난 짓을 하는가?”하고, 그길로 판옥에 굳게 가두고 경계를 심하게 하였다. 몇 일 뒤 왜가 힐문하면서 말하였다. “네가 이로써 결약하면 능히 너희 나라를 회복하겠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과연 내 마음과 내 행동 같이하면 어찌 다만 내 나라만을 회복하겠는가? 실로 천하 금수의 풍속을 바꿀 수 있으되, 단지 나 같은 자가 적을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이처럼 횡행하는 것이다.”

하루는 공주 경무부장이 포병 열두어 명을 거느리고 끌어내 물었다. “네가 이 아무개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그렇다. 네 이름은 뭐라 하는가?” 왜가 버럭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 “감히 이렇게 당돌할 수 있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의리로 말하면 너는 나의 원수요 존비로 말하면 나는 중화며 너는 오랑캐이니, 너라 호칭함이 어찌 공손하지 않다고 하는가?” 왜가 말하였다. “들으니 네가 민적에 들지 않는다 하니 바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이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가 망함에 굶어 죽었는데 너는 어째서 죽지 않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한나라의 소중랑은 북해 상에서 한나라의 부절을 지닌 채 죽지 않았고, 송나라의 김인산은 세상을 등지고 금화산에 숨어 살면서 생을 마쳤고, 우리나라 청음 김상헌은 중국 심양에서 항의하다 살아 돌아왔으되 의론하는 자들이 백이·숙제와 다르게 보지 않았으니,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어찌 옳지 않은가?” 왜가 말하였다. “옛적에 백이·숙제와 칭송은 같고 행실이 다른 자가 있으니, 이윤이 이런 분이로되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닌가?’하였으니, 어찌 이를 본받지 않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하나라 걸왕은 천자요 상나라 탕왕은 제후라서 이윤에게는 다 군신의 의리가 있고 단지 선악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말이 이와 같았거늘 세상에 임금을 잊고 원수를 섬기며 행실이 개돼지 같은 자가 감히 이윤을 이끌어 구실을 삼으니, 이는 성인의 글을 잘못 읽고 책임의 성인을 잘못 인식한 자이다. 대저 남의 나라를 빼앗으면 종국엔 반드시 패망하는 것이 또 사람과 짐승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얼음과 숯불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니 각기 자기 나라를 지킨다는 뜻으로 돌아가 너희 임금에게 고함이 옳다.” 왜가 멍한 모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혹은 별관에 가두고 혹은 감옥에 가두어, 늦추고 핍박함이 한결같지 않았지만 끝내 굽히지 않을 줄 알고 년 말을 기하여 석방하니 모두 70일 감옥에 있었다.
한 절의로 시종일관함에 말이 바르고 이치가 순하니 저들 또한 감복하여 혹은 양반이라 호칭하고 마침내 일등 대남자라 호칭했으며 심지어 왜에게 붙던 자들까지도 처음에 심히 비웃더니 뒤에 머리를 굽혀 공경을 다하니 정의가 취향을 달리하는 사람까지도 감복시킴이 그러하다. 문인과 자질이 날마다 읍에 들어가 옥중 생활을 탐문하더니, 하루는 선생이 작은 칼을 청구하면서 손톱 자르는 용도로 핑계를 대니, 그 의도는 장차 머리털 깎이는 환란을 염려하여 자살의 도구를 예비한 것이었다. 또 집안 및 경운과 문생에게 편지를 보내 뒷수습을 잘하는 방도로 권면하였다. 옥중에서 지은 시에,
5~6년 전에 이미 이곳을 거쳤으니, 여생 지금 다시 죽음으로 기약하네. 찬바람 이는 감옥 외로운 등불 아래, 누워 청음의 설교시를 읊노라. 또, 오랑캐(犬羊) 무리 속에서 이미 30일, 가정 일 모두 잊어 단지 내 몸뿐이라네. 창과 칼이 공중에 눈서리처럼 번득이되, 마음엔 한 덩어리 봄기운이 줄어들지 않네. 교목을 읊조린 시에, 백년의 교목 바라봄에 가볍지 않으니, 우뚝 하늘 높이 인간 세상을 벗어났네. 어찌 유독 봄여름만 영화를 누리겠는가? 서리와 눈을 흠씬 먹어도 능히 살 수 있다.
이 몇 편이 다 인구에 회자했으니, 여기에서 선생이 현재의 당한 위치에서 도의를 실천하여 그처럼 가혹한 감옥 생활이 마치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정도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왜가 또 묘적신고를 하라면서 분묘의 화로써 협박하거늘, 선생이 역시 죽음을 맹세코 따르지 않고 ‘차라리 선영과 함께 화를 받을지언정 어찌 묘적을 가지고 원수 왜를 따르겠느냐?’는 시를 지었다.

무오년(1918) 가을에 또 다시 수감되었다가 즉시 석방되었다. 12월에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제생을 거느리고 애도하며 성복하고 국복록을 지었다.

기미년(1919)에 해소 천식으로 숨이 차 나날이 생명이 꺼져가는 가운데서도 신기가 또렷하여 검속을 평소와 같이 하였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장차 죽을 것이다. 다른 생각은 없으나 단지 10년간 왜의 사찰로 끝내 다시 선영을 참배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너희들은 용기백배하고 몸 단속을 다하여 자신의 대책을 확립함이 옳다. 또 우리 부모상에 가난으로 장례범절을 알맞게 하지 못하여 마음에 부족함을 느끼니, 내가 죽으면 단지 심의와 이불 한 벌이면 충분하다.” 임종하는 날에 평상과 자리를 소제하라 명하고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구술하여 쓰게 하는데 말과 글이 통창한 채 드디어 기쁘게 돌아가니, 곧 기미년 12월 6일이다. 향년 53세이다. 문인이 다 가마 하고 이달 10일에 부여 염창리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2년 뒤 신유년(1921)에 공주 중동 선영에 반장하고 몇 년 뒤에 다시 본동 바깥쪽 와야동 모좌 언덕에 이장하였다.

오호라 선생은 총명하고 장중한 자질로 태어나 덕과 기량이 천??으로 이루어 밝음은 은미한 이치를 살피고 굳셈은 그 위대함을 수립하였다. 학문을 함에 순서에 따라 부지런히 해서 주야로 이어지고 경으로서 중심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모를 방정하게 하며 마음에 간직한 것이 순수하여 잡된 것이 없고 바깥으로 표현함에 줄기차게 막힘이 없어 천만인이 막아도 나는 밀고 나가서 한 터럭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비록 지극히 무도한 왜구조차도 형틀을 씌우고 박해하여 극도로 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끝내 능히 독해를 입히지 못하고 고종명하게 했으니, 공자께서 이른바 ‘하늘이 우리 도를 없애지 않는다. 하신 것이 선생 같은 분을 두고 말한 것이다. 평소에 조용히 한 방에 거처하여 바르게 앉아 침잠하여 터득한 것을 미루어 몸으로 가르치니 문인은 부지불각 중에 마음이 취하여 기꺼이 복종하였다.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서 내외를 엄히 하며 무당을 금지하고 예를 실천하였다. 종가가 상화로 인하여 살림을 할 수 없는지라 맏형수를 받들고 우리 아버지 형제를 불러들여 10여년을 동거하고 횡거 선생의 여계와 장공예의 百忍을 손으로 써서 벽에 걸어 집 식구로 하여금 경계하고 살필 바를 알게 하며 또 언문으로 고금의 여행과 당시 윤리와 도덕에 어긋난 일을 요약하여 부녀자로 하여금 귀감을 삼게 하였다. 사람을 대함에 정성을 다하여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일이 의리에 관계되고 사람이 선악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는 칼로 베듯 하고 돌처럼 확고하여 주저하는 ??음이 없었다. 언론이 소통하여 공정하게 보고 공동으로 취하였다. 일찍이 ‘우리나라가 당쟁 이후로 학문하는 선비가 형세에 구애되지 않은 이가 없어 동에?? 끌리고 서에서 당겨서 털을 불어 흠집을 찾아 마침내 국가로 하여금 그칠 곳을 없게 하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은가?’라고 말하였다. 말이 문헌공의 예방사에 이르면 ‘진실로 의심할 만한 점이 있으면 자손 된 자가 말하지 않는 것이 옳지만 우리 선조와 같이 정대한 심법과 명백한 예론이 백세에 의혹함이 없다고 말할 만할진댄 그 억울하게 모함한 것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분별하는 도는 그 글을 나타내고 그 도를 밝히는 데에 있다.’고 하여 일찍이 종씨와 사서답문을 간포하고 또 재종조 문산공이 편찬한 변증문자를 다시 자세히 교정하여 바로잡으니, 대개 선생이 선조의 학문을 독실이 믿어 출처에 어렵고 곧은 의에 깊은 감동이 있으니, 그 심오한 조예의 유래가 멀다. 혼란한 시대를 만나 은거하여 종적은 멀리 나간 적이 없었지만, 국내 상황과 세계정세를 두루 모르는 것이 없어 시대를 상심하고 국가를 걱정함이 진정에서 나왔으니, 그의 꿈에 지은 시에,
백척의 누각에 오르니, 바람 잠잠하고 비 소리 그쳤네. 삼각산은 하늘에 닿도록 우뚝하고, 한강물 땅에 가득히 흐르네. 북쪽 오랑캐 입을 열지 못하고, 남쪽 오랑캐 고개를 들지 못하네.
라고 읊었으니, 그 시대를 추적하여 그 마음을 상고하면, 대개 우리 종묘사직을 회복하고 우리의 정치와 교육을 회복하여 강상의 도를 다시 밝히고 민족자결을 하고자 한 것이 본래 지닌 충심이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다. 일찍이 선생의 말에, ‘중화가 멸망한 한이 나라가 망하는 아픔과 경중이 없다.’하니, 진실로 지극한 의논이다. 슬프다, 왜가 망한지 60년 동안에 국가의 취향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서구문물에 빠져 마침내 호적법을 폐지하여 금수가 되는 지경에 그쳤으니, 선생의 충심과 정성이 실로 근본한 것이 있고 단지 한 시대의 감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해 도를 세운 자만이 거의 이를 수 있다.

선생이 성리설에 잠심하고 묵묵히 연구하여 근원을 통찰하여 사물에 나아가 그 당연한 바를 알고 도를 체념하여 그 소이연을 깨우쳐『사상강설』한 책을 저술하여 이기를 논함에 눈과 마음에 환하고 호락론 및 화서 이항로와 노사 기정진의 학설에 대하여 다 의문 처를 기록하고 또 율곡 선생의 학설로 널리 조율하여 절충하니 독자가 ‘이기심판론’이라 하였다.

경운이 일찍이 선생의 항의 문자를 수집하여『정명록』이라 이름 짓고 “대저 절의와 학문이 애초 두 가지 일이 아니요, 다만 절의는 학문 중 한 가지 일일 뿐이니, 진실로 그 근본이 없으면 어찌 이를 갖출 수 있겠는가? 공이 학문이 깊고 식견이 고명하여 평일 의논이 매양 남보다 한 등급 뛰어나서 개연히 삼대의 성왕 정치를 만회할 뜻을 지녔으니, 그의 말에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이 군신의 의리보다 엄격하다.’하니 이는 진실로 만고에 바꾸지 못할 의론이다.”하였으니, 이로써 선생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신축년(1961)에 문집 4책을 간포하고 몇 년 뒤에 공주 향교의 많은 선비들이 통문을 내 사우를 건립하여 향사하였다. 부인은 문화 류씨로, 곧 겸옹의 딸이니 합장하였다. 2남2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광산 김원중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다 요절하였다. 족제 준영의 둘째 아들 규룡으로 입후를 하니, 선대의 궤범을 계승하여 문집을 간행하고 서원을 건립함에 온 힘을 다하였다. 능성 구병희의 딸을 맞이하여 2남2녀를 낳았으니, 男은 종구, 종호요, 女는 김충현, 김순중에게 출가했다. 또 아들 종린과 이성희, 김학재, 송진영, 조우상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또 ???일남 선학이 있고 조길구, 성하주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증손 이하는 가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지금 선생이 돌아가신지 90년이 되었다. 훌륭한 우리 선생의 큰 덕과 큰 절의가 이미 사람들의 입에 새겨지고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지금 세상이 더욱 강하되어 인문이 옛 같지 않아 병필가가 없으니 이로 보면 장차 비석이 없어도 된다. 그럼에도 삼종형인 종구씨는 묘갈 세울 것을 도모하여 나에게 글을 재촉하거늘, 삼가 긍당 선백부 및 우재 유공이 기술한 행장문에 나아가 상호 참고하여 서술하니, 두 어른은 선생에게 실로 조카이며 고제이니, 그 말의 친절함이 영원토록 믿을 만하다.

명에 이르되,
아, 우리 선생은, 하늘이 내신 빼어난 자품이로다! 군자의 담박함과 간략함은, 비단 옷에 홑옷을 더하셨네. 선생의 태어나심은, 하늘이 실제 온전히 하셨도다! 선생의 학문은, 경과 의를 함께 간직하셨네. 그 도에는, 빗장과 자물쇠를 열은 듯하고, 몸에 쌓인 덕에, 뭇 행실도 우뚝하다네. 속에 찬 것이 밖으로 표현되니, 문장은 평이한 숙속(菽粟)지문이라네. 10년에 걸친 항의는, 작열하는 태양과 같고, 가을 서리와 같다네. 감옥과 형틀을, 큰 대로와 같이 했다네. 만인이 막아도 나는 밀고 나가고, 필부의 뜻 누구도 빼앗지 못한다네. 위태한 상황에서도 도는 형통하니, 왜도 능히 살해하지 못하였네. 공자께서는 인을 이룬다 하셨고, 맹자께서는 목숨을 버린다 하셨지. 선생께서 이를 소유했으니, 그 이름 영원히 아름다우리라! 금강 물 멀리 뚜렷하고, 계룡산 푸르고 울창하네. 선생께서 여기에 잠드셨으니, 지나는 자가 유풍을 들으리라.
선생이 돌아가신지 90년만인 무자년 정월 日에 후학 종손 종낙은 삼가 쓰다.

공주숭의사에서항일투쟁애국지사를만나다 10

성암 이철영 선생의 묘소입니다.
경사가 심하고 계룡도령 춘월조차 제대로 걷기 힘든 곳을 후손인 이종구 선생은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 성묘라도 하고 가야죠" 하며 지팡이를 짚고는 악착같이 오르셨답니다.

묘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상석에는 부인인 문화 류씨와 합장되어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愛國志士醒菴李喆榮先生追慕碑(애국지사성암이철영선생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직접 방문해서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

그렇게 성묘를 마친 이종구 선생을 다시 숭의사로 모셔다드리고 계룡도령 춘월은 계룡산으로 ??아왔는데요.

이날 성암 이철영 선생의 흔적을 따르다가 느낀 것은 언제쯤에나 이 역사들이 바르게 정리될 것인지 현재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으로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선조들께 죄송한 마음만 가득했답니다.
ㅠ.ㅠ

그리고 올바른 자료를 알리고자 성암이선생 묘갈명 병서 해설문을 올렸으니 출처를 명확히 하고 널리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숭의사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331-3

용문서원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340-3

성암 이철영 선생 묘소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산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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