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봉길 의사상
윤봉길(尹奉吉) 의사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요? 윤봉길 의사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지요.▲ 당신을 흠모합니다
▲ 윤봉길은 누구인가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 독서회 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갔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떠났습니다. 이때가 1930년 3월이었지요.
▲ 애국의 상징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미행하여, 평안도 선천(宣川)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상하이를 향해서 갔습니다. 드디어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습니다.
▲ 늠름함에서도 압권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킵니다. 일본군은 시라카와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 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지요. 윤봉길 의사는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 일제를 규탄한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지요. 윤봉길 의사는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습니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金弘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사는 거스를 수 없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습니다.▲ 당신의 쾌거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에겐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애국애족의 선봉장
예산 [윤봉길의사 기념관] 관람과는 별도로 대전 한밭중앙운동장 입구 우측에 윤봉길 의사상이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교육은 바로 이런 위인(偉人)부터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말이나 휴일 때 자녀를 데리고 이곳에 가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청사에 빛날 당신의 애국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