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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금산향교에서 존경을 배우다

존경받지는 못할망정

2021.03.03(수) 12:04:49 | 홍경석 (이메일주소:casj007@naver.com
               	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금산향교
▲금산향교
 
금산향교(錦山鄕校)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리 4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향교이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으며 충남향교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다.
 
각종 표지석1
▲각종 표지석 1
 
원래는 현재 금산읍 하옥리인 옛 백학동(白鶴洞)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고 1684년(숙종 10) 현 위치에 재건립하였으며, 1967년에 명륜당과 부속건물을 보수하였다.
 
각종 표지석2
▲각종 표지석 2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명륜당(明倫堂)·동무·서무·내삼문·외삼문·동재(東齋)·서재(西齋)·교직실·제기고·창고 등이 있다.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중국의 5성 2현과 한국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우로 포진한 표지석엔 역대 금산군수의 이름도 보인다
▲좌우로 포진한 표지석엔 역대 금산군수의 이름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유림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조선 말기 교육제도가 바뀜에 따라 교육기능은 없어졌다. 봄·가을에 석전(釋奠,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다.
 
홍살문
▲홍살문
 
또한 향교에 소장된 판본 45종 171책과 사본 13종 17책은 이 지방 향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금산향교의 입구에는 홍살문과 함께 금산이 낳은 인물 3인의 흉상과 그들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기술한 안내문이 그들의 일생을 알리고 있다. 임영신, 유진산, 임희재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금산향교 안내
▲금산향교 안내
 
승당(承堂) 임영신은 금산 출신으로 1909년 고향의 심광학교, 이어 전주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과 대학원 등에서 공부하였다. 1918년부터 천안 양대학교(良垈學校)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9년에 전주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
 
임영신, 유진산, 임희재의 흉상
▲임영신, 유진산, 임희재의 흉상
 
광복 후 임영신은 1945년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1946년 9월 중앙여자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9월 중앙대학으로의 개편과 학장 취임, 그리고 1953년 2월 중앙대학교 총장, 1961년 11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한다.
 
금산의 연혁
▲금산의 연혁

1945년 10월 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으며, 1946년 2월에 설치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지냈다. 1950년의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50년 2월 상공일보사 사장, 1952년 여성계사(女性界社) 사장 등 언론계에도 관여하였다.
 
‘효’는 예나 지금이나 그 중요성이 불변하다
▲‘효’는 예나 지금이나 그 중요성이 불변하다
 
옥계(玉溪) 유진산은 일본 와세다 대학 재학 당시 독서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32년에 귀국하여 쌍엽농민회(雙葉農民會)를 만들어 농민운동을 펼치다 일본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금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안내
▲금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안내
 
이듬해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충칭(重慶)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34년 일본 관헌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청년운동을 시작으로 정계에 투신했다. 1954년 이래 3·4·5·6·7·8·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야당 중진 의원으로 활약했고, 4·19혁명 후 출범한 장면(張勉)정권에 도전, 민주당의 신구파를 보수양당으로 분당시켜 1961년 2월 김도연(金度演)과 구파 중심의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다.
 
금산 평화의 소녀상
▲금산 평화의 소녀상
 
5·16군사정변 때에는 55일간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고, 1962년 박정희의 3·22군정연장성명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였다. 1970년엔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다.
 
금산 강제 징용 노동자상
▲금산 강제 징용 노동자상
 
임희재는 극작가로 1955년 단막희곡 '기항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데뷔했다. 잡지 '여성계' 주간, 시나리오작가협회 간사, 극단 산하의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희곡·TV 드라마 등 30여 편의 작품을 썼다.
 
충효예 공원
▲충효예공원

이리농림학교를 거처 니혼대학 법과를 중퇴한 임희재의 대표작으로 '복날', '고래' 등이 있다.
 
언덕배기에서 내려다 본 충효예 공원
▲언덕배기에서 내려다 본 충효예공원
 
금산향교 우측 '충효예공원'에 서 있는 ‘금산 평화의 소녀상’과 ‘금산강제징용노동자상’을 통해 지난 역사의 아픔을 새삼 곱씹을 수 있었다. 금산향교 건물과 나란히 위치한 ‘금산기적의도서관’을 오르다 보면 아담한 모습의 팔각정이 보인다.
 
책이 있어 더 정겨운 팔각정
▲책이 있어 더 정겨운 팔각정
 
그 안에 책까지 비치되어 더욱 눈길을 끈다. 이곳으로 나들이 겸 휴식을 위해 찾았다면 여기서 책도 읽고 볼 일이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금산향교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코로나19가 끝나면 다시 찾아 내부까지 속속들이 찾아볼 요량이다.
 
밖에서 본 금산향교
▲밖에서 본 금산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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