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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창왕명석조사리감을 알현하며 백제국 여행

백제 최고의 걸작 '금동대향로'의 진가를 가르쳐준 금석문의 위엄

2021.02.26(금) 20:02:43 | 이기현 (이메일주소:jhdksh8173ahj@hanmail.net
               	jhdksh8173ahj@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사리가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스님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난 후 유골에서 추려낸 구슬 모양의 작은 결정체를 가리킨다. 절에서는 오래전부터 사리가 발견되곤 했다. 이 사리를 넣어 두는 곳을 사리감(舍利龕)이라고 부른다.
  
부여 능산리 절터는 부여 능산리고분군과 나성 사이에 있는 절터로 백제시대 유적이다. 1995년 발굴됐는데, 여기에서 사리감이 발견됐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사리감이 아니라 국보 제288호다.
 
창왕명석조사리감을알현하며백제국여행 1
 
도민리포터가 위대한 민족의 혼이 서려있는 국보를 알현하기 위해 국립부여박물관을 찾았다.
  
창왕명석조사리감을알현하며백제국여행 2
 
관람객들이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방역수칙을 지키며 박물관을 관람 중이다. 요즘 박물관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돼 이런 절차만 잘 지키면 관람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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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가운데 보이는 이 문화재가 바로 국보인 부여 능산리절터에서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감이다.
 
이 사리감은 화강암제로서 윗부분을 아치형으로 처리하여 전체 모양이 능산리고분군의 현실과 같은 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측면을 파서 감실을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창왕명석조사리감을알현하며백제국여행 4
 
높이 74㎝, 너비 50㎝의 이 사리감 오른쪽에는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왼쪽에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명문 내용 중 창왕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며, 그 13년인 정해년은 567년이 된다.
 
창왕명석조사리감을알현하며백제국여행 5

위 금석문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서체인 예서풍의 글자로, '이 사리감은 성왕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에 의해 567년 만들어졌으며, 성왕의 따님이자 창왕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라고 해석이 된다.
 
이 정도 되니까 국보로 인정받는 것이다. 즉 이 유물을 만든 연대, 유물의 내용, 유물의 주인 등 흔적이 명확하게 기록돼 있으므로 말이 더 필요 없는 것이다. 이 명문사리감은 절의 창건 연대 및 발원자 등을 비롯한 사찰의 성격이 확실하게 밝혀졌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이 절터는 창왕의 누이, 즉 왕실에서 발원한 절로서 절의 위치와 관련지어 생각하면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발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사리감의 형태가 능산리고분군 중 최고식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중하총의 현실과 같은 모양이라는 점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백제사찰이 조사되었으나 명확한 절대 연대가 밝혀진 곳이 없는데, 이와 같은 절대 연대의 확인은 백제시대 사찰 연구뿐만 아니라 백제고고학 전반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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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사리감의 뒷면과 측면이다. 카메라 주변의 조명에 따라 사진 색깔이 흰 화강암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앞서 위에서 보여준 사진에는 약간 황색 빛을 많이 받았다.

이 사리감은 절터의 목탑 심초석(心礎石) 위에 심주와 함께 나란히 세워 놓여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삼국시대 사리감의 최초 방식이라 한다. 또한 명문의 글씨체가 중국 북조계의 글씨체인 점도 당시 백제가 중국의 북조와도 활발하게 교류했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점은 이 절터 및 부여 정림사지 등에서 출토된 소조불 등이 북조인 북위의 것과 흡사한 점 등에 의해서도 입증이 된다.
  
오로지 큰 전시실 한칸을 완전히 차지하고 있는 금동대향로.
▲오로지 큰 전시실 한칸을 완전히 차지하고 있는 금동대향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사리감의 가장 결정적인 의미는 따로 있다고 한다. 이 절터에서는 백제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금동대향로가 함께 발견됐는데, 이 사리감의 금석문 덕택이 당대 최고의 보물이 그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백제시대 예술의 위대함을 말해주는 금동대향로.
▲백제시대 예술의 위대함을 말해주는 금동대향로
 
향로에는 다양한 조각이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다.
▲향로에는 다양한 조각이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는 국보 제287호로서 높이 61.8cm, 무게 11.8kg이다. 1996년 5월 3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또한 능산리절터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목탑이 있던 터에서는 흙으로 빚어서 만든 각종 기와와 벽돌 등 부자재들이 나왔다.
 
마루끝장식기와
▲마루끝 장식기와
 
각종 기와 유물들
▲각종 기와 유물들
 
기와와 벽돌
▲기와와 벽돌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 그리고 기와의 끝부분을 마감 처리해 주는 암막새와 수막새로 나뉘는데 여러 다양한 문양들이 당시 백제인들의 예술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박물관에서 만난 국보인 석조사리감을 보면서 고대 백제국의 창왕과 성왕 시대를 거슬러 갔다 온 느낌이 들 정도다. 선조들이 후대에게 남기기 위해 새겨 놓은 몇 개의 글자만으로도  이렇게 후대인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선조를 추앙하며 기뻐하게 만니 역사 기록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된다.
 
백제국 충청남도는 오늘도 열일하며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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