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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딸과 아버지의 끝내지 못한 이야기

예산 화순옹주 홍문

2021.02.02(화) 11:04:54 | 안개비 (이메일주소:hae041@naver.com
               	hae04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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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위 김한신 묘

예산으로 발걸음을 옮긴 김에 추사고택으로 향합니다. 저 멀리 담이 둘러쳐진 묘지가 보이네요. 묘에 두른 담을 곡장(曲墻)이라 하는데, 왕족에게만 허용되었던 장묘 문화로 이곳에서 곡장을 보니 궁금함이 발길을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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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위김한신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9호)
 
월성위 김한신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로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였고, 월성위김한신묘는 부인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묘입니다. 비신(碑身) 정면으로는 영조의 어필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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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와 김한신 합장묘
 
넓은 터에 깨끗이 관리된 왕가의 묘라고 하지만, 첫 인상은 소박하고 정갈하네요. 그런데,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월성위 김한신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14일 뒤 화순옹주도 그 길을 따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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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묘막 창호문)
 
그 당시 조선에는 노론·서론·벽파·사파 등 사색당쟁이 극에 달했고, 사도세자 문제로 시끄러운 일도 많았던 때였습니다. 사도세자는 매부인 옹주 남편들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다툼 중에 사도세자가 던진 벼루에 맞아 김한신이 병에 들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주로 전해지는데, 화순옹주는 이에 격분하였고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식음을 전폐하여 14일 후에 지아비가 간 길을 따랐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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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
 
합장묘 옆으로는 불에 타 텅 빈 묘막터가 담장 안에 있고, 입구에는 홍문이 자리합니다. 조선시대 유교 사상 아래에서 지아비 김한신을 따라 이승을 떠난 화순옹주는 열녀로 칭송되었지만, 영조인 아버지는 자식이 아비를 앞서서 그것도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떠났다는 것을 불효라 하여 정려를 내려 달라는 주청에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영조가 70세에 이르러 딸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신에 어필을 남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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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와 김한신 합장묘
 
청렴하고 능력 있던 사위 김한신과 사랑하는 딸 화순옹주를 짝지어 주고, 월성위궁을 지어 살게 하였으며 그 당시 귀하다는 백송까지 하사했다는 것은 두 사람에 대한 영조의 지극한 부정(父情)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곡기를 끊었다는 소식에 딸의 사저까지 내려와 손수 미음을 건네던 아버지 영조!
 
하지만, 딸의 사랑은 지아비 김한신에게 더 컸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혼인을 통하여 사색당쟁에 휩싸여 진흙탕이 되어버린 궁을 탈출했다는 느낌이 더 컸을까요? 그렇게 25년을 살면서 한 점 혈육도 없었던 화순옹주가 기댈 곳은 남편인 김한신이 전부였으리라 생각해봅니다. 아버지 영조의 간곡한 분부도 거역할 만큼 그렇게 믿고 따르며 함께했던 남편을 읽은 공허함과 사도세자에 대한 분노, 그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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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정조 어필이 담긴 정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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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 안내문
 
결국 부녀는 서로 자신의 고집만 내세운 것이 아니라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지요. 이렇게 서글픈 사연을 묻고 세월은 흘러서 정조에 이르러 어필이 담긴 열녀문을 내리니, '화순옹주 홍문'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리고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는 사실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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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화순옹주 홍문(출처 과천시 추사박물관 소장)
 
추사 김정희에 관심이 남달랐던 일본인 후지츠카가 남긴 화순옹주 홍문의 모습입니다. 과천시 추사박물관에 추사의 흔적들을 기증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기회 되실 때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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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묘막과 홍문)
 
현재, 화순옹주 홍문의 모습입니다. 이 묘막은 정문 포함 8칸으로 지어진 건물이고, 담장은 후에 관리의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라 하는데, 이 정문이 기초가 되어 추사고택의 정문도 복원했다고 하니 기억해 두세요!

그럼, 영조의 둘째 딸이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홍문은 어디에 있을까요? 눈치채셨나요? 일반적으로 홍문은 집앞이나 마을 어귀에 세우는데, 화순옹주 홍문도 처음에는 '옹주가 살던 마을 어귀에 열녀정문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현재는 묘막터 들어가는 정문 앞에 끼워지듯 세워졌다고 합니다(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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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 
 
건물의 정문은 빨간 점선의 안쪽이고, 끼워진 듯 틈이 보이는 부분이 있지요? 그 끼워진 듯 보이는 바깥쪽이 화순옹주 홍문이랍니다. 문화해설사 선생님께 문의하니, 과거 홍문이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지 않았나 하는 말도 있다고 하는데, 1930년대 사진을 보면 그때도 홍문은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며, 아마도 꽤 오래 전에 묘막 정문으로 옮겨진 듯 합니다. 어찌하든 독특한 형태의 홍문인 것은 사실이네요.
 
딸과아버지의끝내지못한이야기 1
▲화순옹주 홍문(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
 
홍문(紅門)은 충신·열녀·효자들을 표창하고 기리기 위하여 집앞이나 마을 어귀에 세웠는데, 이는 출입문이 아닌 상징적인 건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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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
 
홍살문은 붉은 칠을 하고 둥근 두 개의 기둥에 지붕 없이 붉은 살을 나란히 박았으며, 중앙에 태극 문양이 있는 모습입니다. 홍살문의 유래와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고대(古代) 중국 주(周) 나라의 주례(周禮,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 시대 각국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에 언급되었고, 이는 임금 행차시 임시로 머무는 곳이었답니다.
 
최근 우리나라 홍살문의 유래로 고대 국가인 삼한시대에 소도(蘇塗)에 세워둔 것으로 알려진 '솟대'를 이야기하는데, 기둥을 세우고 신성한 곳을 나타낸다는 의미가 같은 점을 들어 솟대가 그 유래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하네요. 지금의 홍살문이라 불리는 형태는 조선시대에 유교 문화와 결합되어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삼한시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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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
 
아버지가 내리지 못한 정려문을 조카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그 뜻을 기리며 끝을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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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과 월성위김한신묘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을 간직한 채 딸은 지아비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딸은 아버지에게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소리없이 전하고 있겠죠.

화순옹주 홍문
-소재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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