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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공주 우금티 동학농민전투 알림터 가보셨나요?

2020.11.21(토) 13:41:38 | 마라도나 (이메일주소:dksjhks39@hanmail.net
               	dksjhks3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가슴 뭉클한 역사적 사실이 떠오른다. 공주 우금티고개 동학농민전투가 그것이다.
 
일부에서는 '우금치'로 부르기도 하지만 동학전쟁 당시 이곳은 주민들이 ‘우금티’로 불렀기 때문에 공주시는 공식명칭을 우금티로 통일했다.
 
우금티 전투가 동학전쟁 전체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곳이 당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중요한 교두보 전투였고, 가장 많은 농민들(거의 1만명)이 죽은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동학전쟁이 끝났다는 점, 즉 동학의 마지막 항거였다는 점이다.
  
공주우금티동학농민전투알림터가보셨나요 1
 
그래서 동학전쟁에 참여했다 죽은 농민들의 위혼을 기리는 위령탑이 이곳에 건립돼 있다.
  
문장 곳곳이 훼손된 비문
▲문장 곳곳이 훼손된 비문
 
그런데 위령탑을 세운건 박정희 대통령 때였고, 그걸 만든 후 문제가 생겼다.

위령탑 비문에 박 대통령이 '5.16 군사혁명은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라는 구절을새겨넣은 것이다. 즉 동학농민전쟁은 5.16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동학 후손들과 유족이 반발하면서 비문을 훼손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자 최근에 공주시와 문화재청이 협조해 이 비문의 문제점과,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안내문을 별도로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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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월이 흘러 공주시는 지난 10월에 우금티전쟁터에 대한 정비를 제대로 못하던 그 동안의 숙제를 푸는 중요한 절차를 마쳤다. 이곳을 성역화하기로 하고 대대적인 복원과 정비를 하기로 결정한 뒤 ‘우금티전적 알림터(사진의 파란색 부분)’의 문을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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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터에 세워놓은 안내문에서 바라본 저 멀리 우금티의 위령탑이 당시의 원혼을 위로하듯 아득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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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림터는 사적 제387호로 지정된 우금티전적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볼거리를 제공할 목적으로 지난 10월 31일 개관했다. 공주시는 총 사업비 14억원을 투입해 올해 3월부터 알림터 건립과 야외광장 조성, 주차장 정비 등 유적 정비사업과 영상콘텐츠 및 홍보물 제작 등을 추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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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터 내부공간
 
이곳은 우금티전적지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방문자센터 역할을 하는데, 총 132㎡ 규모의 전시실과 영상관, 안내실, 자료 보관실 등으로 구성됐다. 우금티전적 관련 영상과 관련 자료를 전시해 방문객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2006년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추모예술제.
▲2006년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추모예술제
 
2006년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추모예술제
▲2006년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추모예술제
 
2006년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추모예술제
▲2006년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추모예술제
 
전시실 내부 사진 중 2006년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추모예술제가 열리는 모습 세 장이다. 후손, 유가족, 공주시민, 천도교 관계자 등이 참석해 당시 반외세 반봉건을 외치며 쓰러져간 농민들의 혼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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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전쟁 당시 포교지역과 교조신원운동 거점도시를 표시한 지도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두 가지 과제와 맞닥뜨린다. 세계와 흐름을 맞춰 근대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회로 조선을 바꿔 가는 것이 그 하나였고,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냉정한 세계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힘으로 서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1895년까지 조선에서는 커다랗고도 중요한 세 번의 움직임이 있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은 엘리트들이 위로부터 조선을 바꾸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엘리트와 평범한 백성들의 꿈은 행복하게 만나지 못했다.
  
'근대자본주의 국가'를 지향한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지지 계층은 1884년 당시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평범한 백성들의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학군이 반봉건 반 외세를 외치며 봉기한 의미의 제폭구민, 보국안민.
▲'제폭구민'과 '보국안민',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봉기한 동학군의 봉기과정을 알리는 알림터 벽면
 
동학전쟁 당시 사용했던 북의 북테.
▲동학전쟁 당시 사용했던 북의 북테
 
우금티전투를 전후로 한 개요도
▲우금티전투를 전후로 한 개요도
 
이와 달리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은 평범한 백성의 바람을 근본으로 삼았다. 지주-소작제의 문제점을 뜯어고치자는 내용도 개혁안에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갑오개혁 주도 세력과 달리 외국에 다녀온 경험은 거의 없었지만, 외국의 압력에 떠밀려 이뤄진 개방은 백성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더 잘 알고 있었다.
 
개항 후 곡식이 나라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면제품을 비롯한 외국 물품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부유층에게 큰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됐지만, 평범한 백성들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 요인들이 쌓이고 겹쳐 폭발한 것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을 두고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 투쟁으로 이어졌다. 봉건 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 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 노선의 대결이었다. 농민군이 지향한 방향은 봉건적인 생산 관계와 수탈을 제거하고 소상품 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을 보장해 주는 농민적 토지 소유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동학농민항쟁은 탐관오리 제거, 민씨 정권의 타도, 봉건제도 폐지, 친일정권 타도, 식민지화의 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농민전쟁은 투쟁 과정을 통하여 농민 대중에게 봉건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 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 세력으로 강화시켰다.
  
동학의 횃불
▲동학의 횃불
 
동학군의 활동지를 입체적 조혐물로 표시
▲입체적 조형물로 표현된 동학군 활동지
  
알림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발행해 알림터에 비치한 '녹두꽃' 팜플렛

10월 24일 공주로 진격하여 이후 11월 10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처절한 공주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끝내 패배하여 제2차 농민전쟁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우금티전투다.

우금티전투는 농민전쟁의 향방을 가름하는 중요한 전투였으나, 농민군이 대패함으로써 농민전쟁 실패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은 평범한 백성들이 아래로부터 새로운 조선을 만들려 한 시도였다. 지배계층들의 기득권 유지 욕심과 일제의 야만적인 살육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정신은 그대로 이어져 대한민국 독립운동에도 강한 영향을 끼쳐 그 의미가 남다르다.
  
공주시에서 새로 만든 우금티전적 알림터를 통해 전국민들이 이런 사실을 더 많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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