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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

예산 지명의 뿌리, 예산산성

새로 배우는 충남學

2020.06.25(목) 16:23:07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ktx@korea.kr
               	ktx@korea.kr)

멀리서 본 예산산성

▲ 멀리서 본 예산산성



백제부흥군 치열한 전투현장
고려 왕건 때 예산으로 명명
산성둘레 98m, 백제유물 출토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에 충청남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예산산성이 있다. 평평한 산 정상에는 산소들과 농사를 짓는 흔적들이대부분이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흔적은 산 정상 가장자리에 남아있는 옛 토성 흔적이다.

산성산 정상에 남아있는 토성 흔적은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전해온다. 이 산성 이름이 ‘예산산성(禮山山城)’이다.

예산산성은 옛 기록에‘무한산성(無限山城)’ ‘오산산성(烏山山城)’ 등의 명칭으로 전해온다. 예산산성은 백제 멸망 후에 백제부흥군이 당나라군과 맞서 싸웠던 성이며, 후삼국때에는 왕건과 견훤이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예산산성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바로 ‘예산(禮山)’이라는 지명이 이곳에서 탄생되었던, 그야말로 예산 지명의 뿌리가 되는 역사적인 산성인 것이다.

예산의 백제시대 지명은 ‘고산(孤山)’ 또는 ‘오산(烏山)’이다. 이후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서기 919년에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을 ‘예산(禮山)’으로 바꾸고 자신이 신뢰하는 심복을 책임자로 파견했다고 전한다.

백제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산성산 주변이 예산의중심이었으며, 그 중심인 산성산 정상에위치한 예산산성에는 이곳의 지도자가 거처했을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예산이라는 지명을 발표했던 장소도바로 예산산성이었으며, 후삼국 통일을 1년 여 앞둔 934년 5월에는 왕건의 애민사상이 담긴 대민교서를 발표했던 장소로서 역사적인 가치가높은 곳이다.

2016년 발굴 조사된 결과에 의하면다수의 백제시대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백제시대에 축조된 토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발굴 과정에서 백제시대에 만들어진산성으로서 둘레는 980미터이며 7개의 건물 터와 다수의 백제시대유물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김정헌(홍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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