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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기획연재] 현대사의 비극...한국전쟁 그리고 당진 민간인 학살(1)

당진읍, 석문면, 합덕읍, 신평면 등 4곳에서 집단학살사건 발생

2020.06.23(화) 13:50:32 | 당진신문 (이메일주소:psychojys@daum.net
               	psychojys@daum.net)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자료사진. 사진은 기사와 상관없음.

▲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자료사진. 사진은 기사와 상관없음.


읍내리 공동묘지희생사건...180~210여명 희생됐을 것으로 추산


1950년 6월 25일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던 가슴 아픈 날이다. 이 현대사가 낳은 비극은 당진에도 남아 있다. 바로 당진읍, 석문면, 합덕읍, 신평면 등 총 4곳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사건이다.

당진읍에서는 1950년 8월 초순과 1950년 9월 27~28일에 읍내리 공동묘지와 시곡리 야산에서 희생사건이 발생했고, 석문면에서는 1950년 9월 28일 통정리 노학산에서 희생사건이 발생했다.

합덕읍에서는 1950년 9월 중순경 성동리 성동산 성동절터와 구양교에서 희생사건이, 신평면에서도 1950년 9월 중순경 거산리 야산에서 희생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당진신문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진실 규명과 치유에 다가가기 위해 <당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자료출처=신평면지 2017년 발행)

북한공산당의 3개월 점령

당진지역에서 1950년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이 발생한 사실이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에 의해 밝혀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당진에서 발생한 적대세력 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당진지역에서는 인민군이 당진을 점령했던 1950년 7월 12일에서 9월 28일까지 인민군 6사단에 의해 공무원, 전·현직 군·경과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인사들이 당진지역 정치보위부원과 지방좌익에 의해 민간인이 집중적으로 희생됐다. 

당시 인민군 당진군 책임자는 김윤용이었다. 신평면인민위원장은 부수리 최종길, 당진군 경찰서는 내무서라고 했는데 신평면 파출소는 신평면 분주소장으로 금천1리 정해룡이었다. 

리맹위원장은 현 리장격이고, 여맹위원장은 현 부녀회장격이며, 청년공작대가 있었다. 이에 대한청년단과 당진군국민방위군조직군지대가 있었는데 신평면 단장은 장백기, 당진국민방위군조직군지대장은 이상념이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이장, 면장 등 공무원과 전현직 군·경을 비롯해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인사였으며 당시 직업, 우익단체 경력에 따라 지목돼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현장 생존자 및 목격자의 증언과 판결문, 6.25사변 피살자명부 등 각종 자료를 통해 사건의 실재여부와 희생규모를 확인했다. 

당진읍 공동묘지 희생사건 

당진읍에서는 읍내리 공동묘지와 시곡리 야산에서 희생사건이 발생했다. 

첫째, 읍내리 공동묘지에서는 1950년 8월 3일과 1950년 9월 27일 밤에서 28일 새벽에 발생한 희생사건이다. 먼저, 1950년 8월 3일에 발생한 희생사건은 남정산의 희생 사실을 통해 사건 발생 장소 및 희생규모가 확인됐다. 

남정산은 1950년 7월 26일 합덕읍 운산리 자택에서 합덕분주소로 연행되었다가 다시 당진내무소로 이송되어 감금당한 후 1950년 8월 3일 새벽 당진내무서에서 약 1.2km 떨어진 공동묘지 동쪽방향 언덕(현 호서고등학교)로 끌려가 총살됐다. 

남정산의 가족들은 1950년 8월 3일 사건소식을 듣고 공동묘지에 가서 남정산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시신수습 당시 공동묘지에 남정산의 시신이 신원을 알 수 없는 다른 6구의 시신과 함께 줄로 묶여있어 최소 7명 이상이 희생됐다. 

다음으로 1950년 9월 27일 밤부터 9월 28일 새벽에 발생한 희생사건은 사건발생 당시 공동묘지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한 생존자의 진술, 사건발생 과정을 목격한 참고인 진술을 통해 사건발생 장소 및 희생규모가 확인됐는데 1950년 9월 27일 밤부터 9월 28일 새벽, 당진내무서 유치장과 창고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당진내무서 마당에서 전기 줄로 두 손과 다리를 포박, 두 명씩 묶어 당진내무서에서 약 1km 거리에 있는 공동묘지 서쪽 방향 계곡(현 목화아파트)으로 끌고가 그 곳에서 총살했다. 

사건이 발생한 공동묘지는 낮은 언덕 형태로 일명 밤절고개라고 불렀는데, 공동묘지의 계곡은 원래는 폭이 약 3m 정도로 물이 흐르는 곳이었으나 사건발생 당시에는 콩밭이었다. 또한 사건발생 당시를 직접 목격한 참고인의 진술을 통해 희생규모를 추산하면 「6.25사변 피살자명부」에 등재되어있는 68명, 그리고 진실규명 대상자 중 「6.25사변 피살자명부」에 피살 장소가 달리 기재된 7명 등이다. 

두 명단 모두에 등재된 희생자는 47명으로, 중복을 제외하면 총 96명이 읍내리 공동묘지에서 희생되었다. 여기에 두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반공희생자명부」와 참고인들의 진술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진실규명대상자 2명을 포함하면 읍내리 공동묘지 사건의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되는 사람은 총 98명이다. 

읍내리 공동묘지 사건의 희생규모를 사건현장에서 탈출하여 생존한 참고인의 진술에 의해 주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당진내무서 유치장은 4.5평 크기로 3개의 방이 있었다. 각 방에는 70, 80여명이 감금되어 있었고, 유치장 3개의 방이 모자라 최대 150여명까지 수용가능한 10평 규모의 창고 2곳도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즉, 유치장 3개의 방에 240여명과 창고 2곳에 감금되어 있던 인원 300여명을 더한 540여명이 당진내무서 유치장과 창고에 감금될 수 있는 최대 인원이다. 

그러나 540여명이 모두 읍내리 공동묘지에서 희생되었다고 판단 할 수는 없으므로 9월 27밤부터 새벽 사이에 한번에 60, 70여명씩 3차례의 총살이 있었다는 참고인들의 진술에 비추어 전체 희생규모는 180여명에서 최대 21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모두 9월 27일 밤부터 9월 28일 새벽 사이 읍내리 공동묘지에서 희생됐다. 희생자들은 모두 총살됐으며, 총살 이후에는 죽창에 의한 확인 살해를 하였는데, 총소리와 비명스리가 인근지역에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고 한다.

당진읍 시곡리 야산 희생사건

당진읍 시곡리 야산 희생사건은 1950년 9월 28일 밤 송악면 기지시리 송악분 주소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양손을 등 뒤로 하여 철사에 묶인 상태로 송악면 기지시리 입구의 도로 건너편에 있는 당진읍 시곡리 야산 골짜기로 연행하여 희생됐다. 

송악면 기지시리에 거주하던 희생자의 가족들은 1950년 9월 29일 사건발생 소식을 듣고 사건발생 장소로 가서 시곡리 야산 골짜기 아랫부분의 구덩이에 쌓여 있는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 수습 당시 시곡리 야산에 약 16~20구의 시신이 있었다. 희생자들은 총살되거나 구타와 죽창, 쇠창 등에 찔려 희생됐고, 이로 인해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은 심하게 부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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