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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

육지의 충무공 김시민

새로 배우는 충남學

2020.06.04(목) 23:47:34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ktx@korea.kr
               	ktx@korea.kr)

충청남도 기념물 166호로 지정된 충무공 김시민 장군 유허비

▲ 충청남도 기념물 166호로 지정된 충무공 김시민 장군 유허비



천안 병천면 출신 무과 급제
진주대첩 승리는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군 좌절시켜

 
이순신 장군 외에도 충무공이 여럿 있었다. 조선 시대 충무공은 9명이나 된다. 충무(忠武)란 나라를위해 무공을 세운사람들에게 내리는 시호인데, 이 9명의 충무공 중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해 시호를 받은 사람은 2명이다. 한 분은 아산의 이순신 장군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천안의김시민(1554~1592) 장군이다. 물론진주대첩의 주인공, 김시민장군이다. 3800명으로 2만 이상의 일본군을7일간의 공방전 끝에 물리쳤다.

그런데그의 시호가 충무공이란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않다. 아마 이순신 장군이 너무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1592년 4월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해, 채한 달도 되지 않은 5월에 한양을, 6월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7월에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승리하며 제해권을 장악하자, 일본군은 군량 조달에 애를 먹었다.

이에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려고 그길목에 있는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때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진주목사가 바로 김시민 장군이었다.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서 태어나 1578년 25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장군은, 그해 8월 막 진주목사로 승진한 터였다. 진주대첩의 승리는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의 계획을 좌절시킨,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이로써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사기가 꺾였고, 일본군은 전쟁의 전체적인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즉 육지의 김시민과 바다의 이순신에 의해,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김시민과 이순신. 육지의 충무공과 바다의 충무공. 충남이 낳은 이 위대한 2명의 충무공은 죽음으로써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다.
/정응수(천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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